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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경제 성공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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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고현곤
편집국장 대리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의 5공 초기. 대학 도서관 앞에서 한 여학생이 갑자기 ‘군사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전단을 뿌린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복경찰들이 달려든다. 여학생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질질 끌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우리들은 구석에서 숨죽인 채 보고만 있다. 분노와 무기력·비굴한 감정이 뒤섞인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이런 일이 반복된다.

 대학 시절 내게 끔찍한 트라우마를 남긴 전두환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는다. 높게 평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런데 그가 잘한 게 있다. 정권 초기 안정화 시책을 밀어붙인 점이다. 80년은 2차 오일 쇼크가 한창이었다. 정국 불안까지 겹쳤다.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경제가 엉망이었다. 그해 소비자물가가 28.7%나 올랐다. 경제성장률은 -1.5%.

 물가를 잡으려면 긴축이, 성장률을 올리려면 부양이 필요했다. 당시는 고성장을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여길 정도로 ‘성장, 성장’을 외치던 때다. 여기서 전 대통령이 승부수를 던졌다. 성장 대신에 물가부터 잡는 안정화를 택했다. 경제정책의 대전환이었다. 전 대통령의 결심이 있기까지 경제 가정교사인 김재익 경제수석의 역할이 컸다.

 긴축은 고통이 따르는 만큼 인기 없는 정책이다. 게다가 성장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믿는 관료·정치인·학자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안정화 시책에 대해 “순진한 생각”이라는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전 대통령이 잠시 흔들리기도 했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얼마 안 가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세간의 전망을 무색케 했다.

 독재정권의 철권으로 밀어붙인 것 같지만, 의외로 물밑 설득작업이 많았다. 김 수석과 각료들이 여론지도층을 두루 만나 안정화 시책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전 대통령도 이들에게 직접 협조를 구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81년 21.4%, 82년 7.2%로 낮아지더니 83년 3.4%까지 내려갔다. 물가가 안정되면서 성장률은 81년 6.2%, 82년 7.3%, 83년 10.8%로 올라갔다. 80년대 후반의 호황은 안정화 시책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가 어려운 지금, 30여 년 전 상황은 되돌아볼 가치가 있다. 당시 고물가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저물가가 발등의 불이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5개월째 1%대에 머물고 있다. 돈 흐름이 막히고, 소비가 줄면서 경제가 가라앉는 디플레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처방은 30여 년 전과 정반대다. 돈이 돌도록 인플레를 유발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최경환 경제팀이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통화·재정 정책을 쓰고 있다. 전임 현오석 팀에 비해 과감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기존의 정책 틀 안에서 움직인다. 최경환 팀은 뭔가 해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인플레 정책에는 선뜻 동의를 못 하는 것 같다. 물가 안정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한국은행은 말할 것도 없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물가 안정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정도의 정책으로는 디플레를 탈출하기 어렵다. 30여 년 전처럼 정책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고민할 때다. 당시 성장 대신 물가를 택했듯이, 이번에는 물가 대신 디플레 탈출에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러고는 설득과 소통이 필요하다. 서슬 퍼런 5공 때도 정부가 나서서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지금이야 말할 것도 없다. 각료들이 움직이고, 필요하면 대통령도 나서서 이해를 구해야 한다.

 여론은 정부를 조급하게 몰아세우지 말았으면 한다. 최경환 팀 몇 개월 만에 벌써 실패했다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경제정책은 효과를 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5공 때 안정화 시책을 쓰고 3년이 지나서야 물가가 안정을 찾은 점을 기억하자. 상당한 시간과 고통이 수반된 셈이다. 일본의 실패에서 봤듯이 디플레 탈출은 확신과 끈기를 갖고 추진해야 가능한 일이다.

 한 가지 첨언. 인플레 정책을 쓰면 근본적 대책인 구조개혁은 언제 하느냐는 지적이 있다. 당연히 구조개혁은 계속해야 한다. 구조개혁을 해야 돈이 돌고, 디플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디플레 탈출과 구조개혁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반된 개념이 아니다. 맞물려 추진해야 하는 한 몸이다.

고현곤 편집국장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