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검찰, 살아있는 권력이라고 봐주면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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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비선 실세로 지목된 정윤회씨가 10일 검찰 소환조사를 받았다. 이제 ‘정윤회 동향문건’ 수사는 거의 마무리에 접어든 느낌이다. 현재로선 정씨와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 등이 정기적으로 만나 김기춘 비서실장 교체 등을 논의했다는 문건 내용은 근거 없는 것으로 결론 날 가능성이 크다. 정씨도 “이런 엄청난 불장난을 누가 했는지, 불장난에 춤춘 사람들이 누구인지 다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 수사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가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문건 내용에 대해선 ‘찌라시’로, 문건 유출은 ‘국기 문란’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너무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검찰은 수사결과를 발표한 후에도 부담을 안게 됐다. 대통령 측근에 대한 의혹들이 문건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검찰 수사가 국민적 신뢰를 얻으려면 문건 내용 말고도 비선 실세의 문화체육관광부 간부 교체 개입 의혹, 승마협회 압력설도 규명해야 한다. 이는 시중에 떠도는 찌라시 내용이 아니라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이 발언한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공식라인 아닌 비선조직이 부처의 국·과장 인사까지 좌지우지했다는 단서로 볼 수 있다.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려면 검찰이 비선조직의 월권행위가 있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문건의 제보자로 알려진 박동열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이 비선 실세들의 스폰서 역할을 했다는 의혹도 철저히 밝혀내야 할 것이다. 박 전 청장이 문건에 나온 시점 외에 청와대 관계자와 통화하거나 모임을 열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정윤회씨가 자신을 미행하라고 시켰다는 의혹을 제기한 박지만 EG 회장도 검찰 조사에 응해야 한다. 미행설이 사실이라면 박 회장은 미행했다는 사람에게 받았다는 자술서 등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반대로 허위 주장이라면 대통령의 친동생으로서 국정 혼란을 부추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김영삼 정권 말기인 1997년, 당시 ‘소통령’이라 불렸던 대통령 차남 김현철씨 관련 의혹이 불거졌다. 검찰은 그해 1차 한보비리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김씨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김씨의 YTN 사장 인사개입 관련 통화기록이 공개되면서 국회 청문회와 검찰 재수사로 이어졌다. 검찰은 재수사에서도 김씨의 한보 비리연루 혐의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김씨가 동문 기업인들로부터 돈을 받은 것에 대해 조세포탈 혐의를 적용해 구속했다. 한보 비리와 무관한 별건수사였지만 많은 국민은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휘두른 검찰에 박수를 쳤다. 그러나 재수사까지 가면서 온 나라의 관심이 김현철씨 의혹에 쏠리는 동안 국가경제는 무너졌고, 결국 그해 말 국가 부도가 났다. 검찰이 대통령 주변과 관련된 의혹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면 97년 같은 혼란이 되풀이될 것이다. 살아있는 권력일수록 성역 없는 수사가 필요하다. 이는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정상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