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문화재 김태섭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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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피리와 살아온 인생-.14세 어린 소년으로 이왕직 아악부원양성소에 입소한 이래 한평생을 국악에 몸바쳐온 인간문화재 김태섭씨가 이순의 환갑을 맞았다. 『그저 감개가 무량 할 뿐입니다. 더우기 제자들이 정성을 모아 마련해준 회갑기념연주회는 국·양악을 망라한 한국음악계에서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합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태평소기능 보유자인 김씨는 한국인의 한과 얼과 향수를 토해내는 주자의 제1인자. 향피리를 어루만지며 본 회갑일인 18일 제자들의 뜨거운 기념연주(9일 저녁) 에 답할 잔치준비를 걱정했다.
김씨는 「당」「세」「향」 피리 등 피리의 종류 모두에 추종을 불허하는 기능을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가곡·고전무용에도 뛰어나 음악·무용·연주의 3재를 갖춘 국악의 귀재이기도하다.·
『조그마한 긍지를 느낀다면 45년동안 한번도 국악 이외의 다른 일에 외도를 한일이 없다는 것 정도지요. 아직까지 국악에 바쳐온 한평생용 후회해 본적이 없읍니다』
이왕직 아악부원양성소 5기생인 김씨의 국악평생은 국립국악원 창설의「산파역」으로부터 크게 빛을 발했다. 졸업 후 이왕직 아악부아악수로 근무해온 그는 8·15해방후의 혼란기중 모두 이직을 하는데도 성경린씨(3기생) 등과 끝까지 남아1950년 창설된 국악원의 기둥이 됐다.
6·25때는 피난수도 부산에서 갖은 경제적 고초를 겪으면서도 「생의 반려자」인 피리를 손에서 놓지않고 후배들을 지도했다.
현재 양성소 동기생으로 국악계에 몸담고 있는 친구는 「가곡」부문의 인간문화재인 홍원기씨 (60) .
『일제하의 이왕직내 국악연주는 한국문화 말살정책으로 껏 외국 귀빈의 왕실 방문 때나 했는데 잘해야 1년에 한 두 번 정도의 연주가 있을 뿐이었읍니다』김씨의 국립국악원 국악사 생활은 지난 76년 고혈압으로 건강을 해쳐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28년 동안 계속됐다.
특히 국악계에 기록될만한 그의 또 하나의 업적은 생황(큰대로 판 통모양의 아악용 관
악기) 의 연주기법 전수-그는 국악계에서 한사람도 할줄 아는 사람이 없어 단절될 뻔한「생황」의 연주기법을 홀로 간직, 이를 제자들에게 전해주었다.
현재 현역을 은퇴했지만 그의 활동은 「현역이상」 이다. 상근 국립국악원 연주단 자문위원으로 매일 출근, 합주를 이끄는 고수로 장구용 손수치며 국악연주단원들의 합주 등을 지도한다.
이밖에 한양대·추계예술대 등에, 출강, 회갑기념연주희를 베풀어준 70여명의 제자양성에 이은 후진양성을 계속하고 있다. 『국악과 더불어 일생을 지내는 동안 겪은 경제적 어려움이나 인습에 젖은 뭇사람들의 눈초리는 인내와 나름대로의 긍지로 참아냈지요. 나자신이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후진들의 연주독려만은 절대 게을리하지 않았읍니다』
대(죽)처럼 살아온 김씨와 그의 피리가 변덕스럽지 않은 제소리를 끝내 유지해온 것은 욕심을 내지 않고 오직 정직하게만 살아온 외곬의 대쪽 같은 정신 때문인것 같았다.
지금도 「종묘제례악」 연주 때는 직접 나가기도 하는 그의 「처용무」솜씨는 보는 이들의 감탄을 거듭케 한다는 것이다.
『국악과 더불어 살아온 일생에 조금도 후회나 미련은 없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국악의 길을 걷고싶을 뿐입니다』
그에게 소망이 있다면 후배들이 대성하고 국악진흥이 전 국민 생활 속에 뿌리를 내려 도시술집의 밤무대에서까지도 은은한 전통가락이 울려 퍼지게 되는 것.
가족은 부인 용복례여사(55)와의 사이에 4형제-.
하루만 불지 않아도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는 깐깐한 성격의 악기인 피리와 살아온 그의 예술가적 인생행로는 대견스럽기만 했다. <이은윤 기자>
◇약력
▲1922년 서울출생
▲정동보통학교 졸
▲이왕직 아악부양성소수료
▲국립국악원 국악사
▲국립 국악원연주단자문위원
▲한양대·추계예술대 강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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