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10초 안에 웃겨라 아니면 떠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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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A: 내가 드디어 명곡을 작곡했다 (B가 어깨를 툭 친다)

A: 왜 이래!

B: 네 노래 노래방에 있던데 웃기는가. 아니면 생뚱맞은가 우습기는커녕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당신은 구.세.대

위 대목은 SBS 개그 프로그램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하 웃찾사)'중 '왜 이래'란 코너의 한 장면이다. 최근 10~20대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맥락도 없고, 설명도 없다. 언제 웃어야 할지도 모르는, 어른들로선 난감할 뿐인데 젊은 세대는 깔깔거리기만 한다. 이처럼 내러티브(Narrative)가 파괴된, 웃음의 코드만이 넘쳐나는 개그 형식이 확대되고 있다. 웃음이 없음(0)과 웃음이 있음(1)이 반복되는, 이른바 '디지털 개그'의 전성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예상을 거부한다

지난 25일 서울 등촌동 SBS 공개홀. '웃찾사' 출연진이 다음날 녹화를 앞두고 최종 연습을 하고 있다. 디지털 개그로 분류되는 '혼자가 아니야' 멤버들이 시범을 보이자 담당 PD가 날카롭게 지적한다.

"조금만 늘어져도 사람들이 다 눈치채. 그럼 재미없잖아. 바로 바로 받아쳐야지."

과거 코미디는 마치 소설처럼 발단-전개-절정-결말의 일정한 루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개그는 엉뚱하게 튀어나온다. SBS 민의식 PD는 "최근 개그 경향은 전개와 반전만 있다. 미리 분위기 잡고 지금 왜 이런 얘기 하는지 등이 생략된다"고 설명했다. 방송가에선 올 초부터 방영되기 시작한 웃찾사의 '화상고' 코너를 디지털 개그의 시초로 꼽곤 한다.

"처음엔 나도 난감했다. 상황 설명이 전혀 없이 웃기는 말.표정.동작만으로 이루어져서 시청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연습 과정을 지켜본 젊은 연출부들이 재미있다고 난리였다. 막상 무대에 올려보니 객석부터 반응이 뜨거웠다. 웃기기 위한 '사전 작업'이 젊은 세대에게 굳이 필요 없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웃찾사 심성민 PD의 말이다.

'희한하네'는 디지털 개그를 조금 변형한 코너. 약간의 내러티브가 있지만 이야기는 럭비공처럼 이리저리 튕겨다닌다. 개그맨 조영빈씨는 "'건망증'이란 컨셉트에서 출발했다. 자꾸 잊어버린다는 설정 때문에 스토리에서 벗어나는 웃음의 소재를 끌어다 쓸 수가 있다"고 말한다.

# 10초 내 터뜨려라

호흡이 빨라지는 것은 최근 개그의 대세다. 과거 코미디와 비교하면 그 차이는 확연해진다. '쓰리랑 부부' '도시의 천사들' 등으로 유명했던 KBS '쇼 비디오 자키'는 1980년대 중반 최고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 87년 방영됐던 50분짜리 1회 분엔 모두 7개의 코너가 있었다. DJ 김광한씨가 각 코너 사이를 연결하는 진행자 역할을 했고, 코너당 평균 방송 시간은 6분이었다. 코너당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오는 경우는 8번 정도. 수치로 따져보면 45초에 한 번씩 웃긴다는 계산이 나온다. <표 참조>

반면 지난 25일 방송된 '웃찾사'의 경우, 모두 13개의 코너로 구성돼 있다. 코너 수만으로도 '쇼 비디오 자키'에 비해 2배 가깝다. 당연히 코너당 방송 시간은 짧아져 평균 4분 12초가량 됐다. 반면 웃는 경우는 더 많아져 코너당 대략 21회 정도였다. 통계상 12초마다 웃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왜 이래'코너는 2분40초 동안 무려 29번이나 웃음의 장치가 마련돼 있었다. 5.5초마다 웃긴다는 얘기다. 개그맨 남명근씨는 "시작하자마자 10초 안에 웃길 수 없으면 버티지 못한다는 게 최근 개그계의 정설"이라고 말한다. '쇼 비디오 자키'의 담당 PD였던 김웅래(현 인덕대 방송연예과 교수)씨는 "코너의 생명력이 짧아졌다. 예전엔 웬만하면 한 코너가 1년 이상 유지되는 게 보통이었다. 최근엔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6개월 이상 끌 수 없는 실정"이라고 진단했다.

# 웃음의 하이퍼링크

디지털 개그가 성행한 데에는 개그 프로그램의 무대가 스튜디오에서 공개홀로 바뀐 것과 무관치 않다. 웃찾사 목연희 작가는 "공개홀은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공간이다. 이야기가 있는 웃음보다 돌발적인 상황이 관객의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데 더 유리하다"고 말한다.

시청 태도가 달라진 것도 한 원인이다. KBS의 한 예능 PD는 "최근 젊은이들은 '인터넷 다시 보기'를 많이 이용한다. 프로그램도 다 보지 않고 좋아하는 코너만 골라 본다. 심지어 한 코너에서도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특정 부분만 본다. 앞뒤가 다 잘리니 당연히 제작진도 스토리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고 전한다. 근본적으론 인터넷 서핑 문화가 디지털 개그를 확대시킨다고 볼 수 있다. 대중문화 평론가 성기완씨는 "인터넷은 한 사이트에서 다른 사이트로 옮겨가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두 사이트 사이엔 연관성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젊은이들은 그만큼 논리와 순서가 없는 상황에 익숙하다는 얘기며, 오히려 갑작스러움에서 쾌감을 느끼곤 한다"고 분석했다. 아날로그 세대로선 이젠 웃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 오고 있는 듯싶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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