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6)제79화 육사졸업생들(19)|장창국|광복군 계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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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 항일 무장운동은 군대해산(l907년)후부터 시작되어 1단계는 국내에서의 의병운동, 2단계는 만주에서의 독립군운동, 3단계는 중국대륙에서의 광복군운동으로 진행됐다.
광복운동에 종사한 분들은 주로 중국의 각종 무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중국 군에 편입돼 있던 중국 군 장교들이 많다. 그래서 광복군 계를 중국 군 계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김홍일·이일태·최용덕·김시창 장군 등은 중국 군에 특히 오래 있었지만 많은 분들이 일찍부터 광복군 요원으로 활동했다. 종전을 전후해서는 중국 군에 소속돼 있던 분들도 대부분 광복군으로 들어왔다.
광복군 출신들이 다닌 학교는 장개석이 새운 황포 군관학교를 비롯하여 중앙무관학교, 각 군벌 계의 무관학교, 그리고 청조 때의 육군군관학교도 있다. 초대 국방차관과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최용덕 장군(장개석 전용기 조종사)이 바로 청조군관학교 졸업생(1916년)이다.
중국 군 계 중에서 민족주의 계통이나 이남출신들은 남한으로 왔지만 이북출신 또는 좌익계열은 북한으로도 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낙양 군관학교를 나온 장평 산이다. 그는 1935년 군관학교를 나온 후 연안으로 가서 팔로군의 대대장을 했고 8·15후에는 평양으로 가서 군단장까지 했다. 그러나 50년대 말에 반 김일성 쿠데타 혐의로 숙청, 처형됐다.
중국혁명군 양성소였던 황포 군관학교의 후신인 육군중앙군관학교는 자체 안에 특별 훈련 반, 각 성에는 분교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우리 한인들은 이들 특별 반이나 분교에 많이 들어갔다.
그러나 통위 부장을 지낸 유동설 장군처럼 일본육사(15기)를 졸업했거나 오광선 장군(육사8특·준장·작고)처럼 우리독립군의 신흥무관학교를 나온 분들도 있다.
광복군 출신 중에는 귀국 후 국방경비대는 미군정의 군대지 우리독립국의 군대가 아니고 일군 계나 만군 계와 같이 일할 수 없다는 등의 이념·명분 관계로 군에 들어가지 않은 분이 있었다.
또 어떤 분들은 귀국이 늦어지는 바람에 마땅한 자리가 없어 그만둔 분들도 있다.
그러나 군정당국이나 독립후의 우리 정부가 이들을 영입키 위해 노력했고 특히 광복군의 대 선배인 유동설 통위 부장과 이범석 국방장관(국무총리 겸직)의 권고가 있어 많은 분들이 뒤늦게나마 군에 들어오기도 했다.
이들을 출신학교별로 보면-.
황포 군관학교 출신으로는 권 준(황포4기·중국 군 대령·육사8특·작고)·박시창(황포5기·중국군 대령·육사3기·소장·대동공업 고문)·장흥(황포5기·중국군 대령·육사7특·소장·대한전선 고문)·최덕신(황포 10기·육사3기·중장)·박기성(황포 11기·육사3기·준장·대한 중석 고문)·유해준(황포15기·군영·소장·삼성중공업 고문)장군 등 이 있다.
이범석 장군이 나온 운남 강무당 출신은 약 10명이 되는데 그중 이준식(8특·중장·작고)김관오(7특)장군 등 이 국군에 들어갔다.
그밖에도 광복군계열은 귀주군관학교를 나온 김홍일 장군(중국군 소장·특임·중장·작고), 초대 경비대사령관을 했고 6·25때 납북된 하남군관학교 출신의 송호성 장군(2기), 보정 군관학교 조개옥씨, 그리고 왕정 위 정권(일제가 급조한 남경정부)의 남경군관학교를 나온 이성가(중국군 소령·군영·소장)·이응조(특임·준장)장군 등 이 있다.
중국 육군 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 반 17기로는 임정 법무부장으로 있으면서 대 국민정부(장개석 정부)창구역할을 한 박찬익 선생의 아들인 박영준 장군(중국군 대령·8특·소장·대림산업 상임고문)이 있고, 격양분교 출신으로는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춘생(8특·중장), 김동수(특임·준장·작고), 고시복(2기·준장·작고)장군 등 이 군에 들어온 분들이다.
그밖에도 광복회 부회장이며 광복군 동지회장으로 있는 김국주 장군(7특·소장)이나 채원개 대령(작고), 공군으로 간 김신 장군 등 이 광복군계열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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