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 사건(39)|야당 단일후보 협상은 결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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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진보당 창당은 순조롭지 못했다. 「진정한 혁신은 피해대중의 자각과 단결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를 배척하고 대중본위의 경제체제를 확립한다」 는 선언이 기본노선. 그러나 자유·민주 두 정당을 싫어한다는 공통성이 있을 뿐 우익청년단 출신에서 민주사회주의자까지의 다양한 대열의 라인업은 쉽지 않았다.
특히 죽산계열의 압도적 우세가 도리어 창당을 어렵게 했다. 당시 죽산 주변엔 우익청년단 출신이 많았다. 민족 청년단이란 과격단체가 죽산부대의 행동대가 된 경위는 우파청년조직이 죽산을 둘러싸게 되는 과정을 말해준다. 최희규씨의 증언. 『3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몇 지도자와 회견했다. 나는 죽산을 찾아가 꽤 당돌한 의견을 했다.

<다양한 세력모여>

<세상 사람들이 선생을 모스크바 경방 공산대학을 나온 공산주의자라고 하는데….>

<내가 공산당 창당 멤버가 된 것이 24세 때다. 당시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자는 운동에 서명한 사람이 1백8명이었다. 이들 모두가 한자리에 모일 수는 없으니까 1도1인으로 해서 13인이 회의를 열었다. 그래가지고 독립운동의 방법을 토론했다. 무력도 조직도 돈도 없는 우리로서는 국제적인 후원을 받아야했다. 마침 약소민족 해방의 기치를 내걸고 있던 소비에트연방이 우리가 찾을 수 있었던 좋은 후원자라는 결론이었다. 그래서 조선공산당을 발족시킨 것이다.>

<나는 김구선생의 애국노선을 흠모했다. 남한단독정부 반대는 민족적 양심이었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있다. 그런데 죽산선생은 이 박사와 짜고 단정을 지지하고 농림장관도 하지 않았나….><나는 모스크바의 지령이니 신탁통치를 지지하라는 박혜영의 편지를 받은 뒤 민족주의 노선을 밝히고 공산당을 떠났다…공산당을 나쁘다고 해놓고 가만히 있으면 나는 패배하고 결국은 죽게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겨야하고 이기기 조직이 필요했고 이박사와의 협력이 필요했다.>
그날 죽산과 근 3시간 얘기를 하고 그 결과를 보고했더니 모두들 찬동해 죽산 중심의 정당에 집단 참가했다.』 56년 3윌31일 진보당은 「전국추진 대표회의」를 열어 정·부통령 후보를 지명하기로 했다. 신도성씨의 회고. 『대회 직전 나는 죽산과 담판을 했다. 혁신 정당에 정권이 돌아올 시기는 아니다. 우리는 이 땅에 진보주의의 씨를 뿌리고 가꾸는 노력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굳이 죽산이 대통령 후보가 되어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속암이(서상일) 대통령 후보를 맡겠다고 하니 죽산은 부통령 후보를 맡아달라고 했다.

<장면씨 사퇴거부>
죽산도 혁신세력의 집권 시기가 성숙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의 제안을 수락했었다.
그러나 죽산계열이 사전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상일씨로는 표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대표대회는 투표를 통해 대통령 후보 조봉암, 부통령 후보 서상일로 지명했다. 그러자 서씨는 <조봉암은 대통령병 환자>라면서 부통령 후보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예상 밖의 인물인 외과의사 박기출이 진보당의 부통령 후보가 됐다.
진보당이 선거전열을 갖추자 곧바로 민주당과의 단일후보 조정문제가 제기됐다. 정권교체를 위해 야당후보가 둘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무소속의원의 모임인 위정동지회, 그리고 정화암·장건상씨등 혁신계 원로들이 단일화협상의 압력부대였다.
민주당과의 협상대표였던 진보당측 대표 신도성씨의 1차 회담에 관한 증언.
『진보당은 대통령 후보, 민주당은 부통령 후보가 사퇴하도록 하자고 제안했으나 민주당이 거부했다. 사실 당시 민주당 신파에선 이대통령과 겨루는 대통령보다는 이기붕과 겨루는 부통령이 승산이 있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민주당측은 박기출은 장면에 비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표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럼 죽산은 해공(신익희)보다 표가 적어 후보사퇴를 하는 즐 아느냐>고 맞섰다.
이런 줄다리기가 계속 되고 있을 때 해공이 나를 불렀다. <신의원, 장면씨를 잘 알지. 그 사람이 부통령 후보를 그만둘 성 싶으냐. 차라리 내가 그만 두는 게 낫지…. 장면보고 후퇴하라는 건 나보고 얘기야>라고 했다. 달리 할말도 없고 해서 <저희들로선 조정을 못하겠읍니다. 두분 후보들이 직접 담판을 하십시오>라고 하고 우리는 손을 떼었다.
4월25일 민주·진보 양당 후보 회담이 열렸다. 장면씨는 이 회의에 나오지 않았다.
그 이틀뒤인 27일엔 신익희·조봉암 양자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이 회담 후 진보당은 야당 단일후보 협상은 결렬되었다고 선언했다.
『나는·야당진영의 단일전선을 희망하는 국민의 여망에 보답하기 위하여 나의 대통령 입후보를 철회하기로 결심했고 다만 이번 선거에서 우리당의 이념과 정책을 국민 앞에 심판받고자 하는 당내 대중의 제지할 수 없는 의욕과 명실상부한 공동전선을 이룩하기 위해 부통령후보만은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이 제안에 대해 신익희 후보도 25일 회담에서 찬성을 표시해 두 정당의 정·부통령후보 4인이 회합해 최종적 타결을 짓기로 했었다. 그러나 27일 약속된 회합에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은 출석치 않았고 단독으로 나온 신씨는 장씨의 불참 이유는 부통령 후보를 사퇴할 뜻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상 더 연합문제를 협의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라는 것이 죽산의 설명이었다.
장면씨측의 조재천씨는 『후보자 단일화는 야당 승리의 가능성을 높이는데 뜻이 있음에도 부통령 후보에 관한 진보당의 제안은 국민의 뜻에 맞지 않는 형식과 체면에만 구애된 것이었다』고 응수했다. 협상의 결렬선언이었다.
2년 전 민주대동운동 때 조봉암을 공산주의자로 규정, 정당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했던 장면씨에 대한 진보당측의 해묵은 감정이 협상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이런 성명은 표면의 정치였을 뿐 실질적 막후 협상은 이 때부터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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