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전략] 브란트, 피해자 앞에 무릎 꿇어 ‘통독의 씨앗’ 뿌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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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호 28면

1970년 12월 7일 게토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과거를 사과하며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꼭 44년 전의 오늘,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유대인 격리지역)의 희생자 추모비 앞. 마침 내리던 비가 그치고 추모비를 숙연하게 응시하던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브란트가 추모비 앞에서 억울한 죽음들을 애도할 거라고는 예상됐었지만 축축한 바닥에 무릎까지 꿇을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이런 브란트의 행동은 서독 내에서 거센 반발을 가져왔다. 브란트의 지지자들조차 무릎 꿇은 행동을 비판했다. 그렇지만 이는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주변국에선 젊은 시절 나치에 저항하다 박해받은 브란트가 나치와 독일 국민을 대신해서 사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진정성 있는 사죄가 있었기에 훗날 주변국들은 독일의 재통일을 허용했다. 사실 독일의 입장에선 오늘날 폴란드 서부 접경지역이 역사적으로, 또 국제법적으로 자국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독일은 이런 정치적 영유권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 결과 독일은 다시 통일할 수 있었고, 유럽 연합이 확대됨에 따라 과거 독일이 한때 점유했던 지역들은 자연스럽게 독일 경제권역에 포함되었다.

⑥ 마음 얻는 첫걸음

주변국 방문 때 무릎 꿇은 독일 총리는 빌리 브란트뿐이 아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폴란드 방문, 그리고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프랑스 방문 때도 그런 행위는 있었다. 모두 진정성을 인정받았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무릎 꿇은 히틀러.

44년 전 브란트가 무릎을 꿇은 바르샤바 게토에서는 다른 독일 지도자의 무릎 꿇기도 있었다. 2년 전인 2012년 12월 초, 아돌프 히틀러다. 실제 살아 있는 히틀러가 아니고 이탈리아 예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이 히틀러 얼굴을 재현해 만든 조각상(아래 사진)이었다. 이에 유대인 유족들이 반발했다. 희생자를 모독하는, 상업적 행위에 불과하다면서 작품 철거를 주장했다. 결국 다음 해에 철거되었다. 중요한 것은 무릎 꿇기가 아니라 진정성이다.

‘주는 것이 얻는 것’ 깨닫는 게 정치
사마천은 상대 마음 얻기를 신의로 이해한 듯하다. 『사기』 ‘관안열전’에서 노나라 장수 조말은 제나라 왕 환공을 칼로 위협해 노나라 땅을 돌려주겠다는 환공의 약속을 받았다. 뒤에 환공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했으나 관중이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조말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조언했고, 이에 환공은 노나라 땅을 돌려주었다. 이후 다른 제후국들은 관중의 예상대로 제나라에 귀의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주는 것이 얻는 것임을 아는 게 정치(知與之爲取 政之寶也)”라는 말이 등장한다. 제나라가 노나라에 보여준 신의는 다른 제후국들에 그대로 전파되었고, 제나라는 노나라에 양보한 것 이상으로 훗날 더 큰 보상을 받았다. 사실 제나라뿐 아니라 노나라의 전략도 통했다. 환공을 인질로 땅을 돌려받았기 때문이다. 인질 전략이 늘 효과적이지는 않다. 만일 테러범이나 납치범과는 협상이나 대화 자체를 절대로 하지 않는 상대라면 그 상대에게 어떤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테러나 납치는 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래서 일부 나라에서는 테러나 납치를 예방하기 위해 그들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고수한다.

조말의 행위는 엄밀한 의미의 인질 전략이 아니다. 약속에 대한 아무런 보장 없이 환공의 말만 믿고 환공을 풀어주었다. 조말은 환공을 위협해서 얻은 약조를 환공이 지킬 것이라고 과연 믿었을까. 노나라는 힘으로 땅을 되찾을 수 없고, 남은 방법은 제나라에 읍소해 애원하는 것, 그리고 인질을 잡아 요구하는 것 두 가지뿐이다. 읍소의 방법만으로는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나라가 모든 나라의 읍소를 다 들어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인질로 요구하는 내용도 어느 정도 타당해야 한다. 타당하지 않은 요구는 제나라에 약속 번복의 구실을 제공했을 것이다.

칼로 위협해 받은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고 인질을 풀어주는 것은 대의명분과 큰 목표를 가진 상대에게나 통할 전략이다. 말 바꾸기를 밥 먹듯이 하는 상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협상 시 백지수표를 제시하는 전략도 상대를 봐가면서 구사해야 한다.

싸움 없이 이기려면 상대를 존중해야
여러 설문조사에 따르면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대체로 신뢰를 받는 특정 국가들이 있고, 반대로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대체로 불신을 받는 특정 국가들도 있다. 신뢰와 매력은 국가 간에도 존재한다. 신용이 개인적 자본이라면, 사회 신뢰는 사회적 자본이고, 대외 신뢰는 외교적 자본이다. 독일이 폴란드와 유대인에게 보여준 양보화해사죄는 다른 주변국의 마음을 샀고 독일 통일에 대한 주변국의 동의로 연결되었다.

싸워서 뭐를 얻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얻는 것이 더 나음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손자병법에서도 백전백승(百戰百勝)보다 싸우지 않고 양보 받는 게(不戰而屈人之兵) 최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 이기기를 좋아하는 자는 질 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싸우지 않고 얻는 전략 가운데 하나는 상대를 존중하기다. 사실 존중은 도덕이나 윤리 차원의 개념이 아니라 전략적인 개념이다. 왜냐하면 상대를 존중함으로써 자신도 더 나아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남을 도우면 자신의 면역 기능이 향상된다는, 이른바 ‘테레사 수녀 효과’ 혹은 ‘슈바이처 효과’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이타적 행동은 남을 도와주는 데서 오는 행복감뿐 아니라 물질적 보상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2011년 미국 프로야구 경기에서 관중석으로 날아온 공을 받은 소년이 그렇지 못해 울고 있는 아이에게 공을 양보했는데, 이 선행 장면이 TV로 생중계되어 그 소년은 더 큰 선물을 받기도 했다.

상대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는 뭔가를 주어야 한다. 그 뭔가는 실리적 물건일 수도 있고, 또 아무런 혜택 제공 없이 상대를 편하게 만들어 주는 말일 수도 있다. 일방적으로 물질적 혜택을 제공받는 자는 자신이 상대에게 정서적 혜택을 제공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경우 그 정서적 혜택은 대체로 말로만 하는 립 서비스다.

진정성 없이 상대를 존중하는 체할 수도 있다. 생색낼 수 있는 일은 본인이 직접 하고, 남을 아프게 할 일은 다른 남에게 시키기도 한다. 자기 개인의 것이 아닌, 단체 소유의 것으로 생색내기인 계주생면(契酒生面), 그리고 남의 칼로 다른 남을 죽이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은 남의 기분을 의식한 행위다. 이간질이나 이이제이(以夷制夷) 모두 차도살인의 범주에 속한다.

이와 달리 자기를 희생해서 남에게 혜택을 줘도 말로 모욕감을 주면 악의가 없었다손 치더라도 미움을 받아 손해 보기 십상이다. 특히 진실이 다수에게 아픈 상처를 줄 때 그 다수는 불편한 진실보다 편한 거짓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세련된 거짓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기조차 한다. 지동설처럼 진실을 믿거나 주장한 소수가 박해를 받았던 역사적 사례는 무수히 많다.

실제 존중과 아부는 구분하기 어렵다. 대체적으로 존중 받기를 갈망하는 사람일수록 아부에 약하다. 아부가 문제될 때에는 아부 받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런 아부 행위를 아부 행위자들만의 탓으로 나무랄 수는 없다.

마음 비워야 마음대로 얻는 게 세상 이치
민주주의에서는 권력자에 대한 아부만큼이나 유권자에 대한 아부도 심각하다. 정치인의 선심 대부분은 계주생면에 불과하다. 조삼모사(朝三暮四)는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주는 것 대신에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줌으로써 인기를 얻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조삼모사는 큰 문제가 아니다. ‘아침 3개, 저녁 4개’와 ‘아침 4개, 저녁 3개’는 실제 원숭이들에게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유권자가 ‘아침 3개, 저녁 4개’보다 ‘아침 4개, 저녁 1개’에 더 끌리는 수준이라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유권자가 긴 안목을 가지면 조삼모사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유권자를 의식해 가급적 많은 혜택을 주려고 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고, 실제 혜택은 적게 주면서 눈속임 하는 것이 나쁜 것이다.

개인이나 집단의 행위는 복잡한 전략적 계산 없이 “그냥 좋아서” 혹은 “그냥 싫어서”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현행 단임제 대통령 임기 말에는 현직 대통령의 인기가 추락하고, 따라서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은 반대에 직면하며, 나쁜 모든 게 대통령 탓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 많은 정치적 반대 행위가 “노무현이 싫어서”라는 이유로,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임기 말의 정치적 반대 행위 다수는 “이명박이 싫어서”라는 이유로 선택되었다.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 마음을 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상대 마음을 사려면 자신의 마음부터 바꾸어야 할 때가 많다. 자신의 마음을 바꾸면 그 바뀐 마음대로 무엇이든 얻게 된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곧 마음대로 얻게 되는 지름길이다.



김재한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연구소 National Fellow,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 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저서로는 『동서양의 신뢰』 『DMZ 평화답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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