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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 자연사 이야기] ‘절대 바늘’ 발명 덕에 지금까지 생존한 호모 사피엔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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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호 25면

바늘귀가 있는 바늘을 발명하지 못한 네안데르탈인은 몸에 걸치고 끈으로 묶는 게 전부인 가죽옷을 입었다. 매일매일 동상과 저체온증에 시달려야 했다.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2㎞인 상자 하나만 있으면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개미를 다 담을 수 있다. 같은 상자에 현존하는 인류 71억 명을 모두 담을 수도 있다. 개미의 크기를 생각하면 도대체 개미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만 해도 까마득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 상자에 들어가는 개미는 최소한 1만2000종(種)이나 되지만 같은 상자에 들어가는 인류는 오직 한 개의 종, 즉 호모 사피엔스뿐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지구엔 호모 사피엔스 단 한 종만 살아남았을까?

<19> 인류의 멸종과 생존

27종 인류 중 단 1종만 살아남아
700만 년 전 인류 계통과 침팬지 계통이 갈라선 시점을 1월 1일 0시라고 하고 지금을 12월 31일 자정이라고 가정한 인류 달력을 만들어보자. 이 달력엔 최소한 27종의 인류가 등장한다. 여태 발견된 인류가 27종이란 뜻이다. 실제 존재했던 인류 종은 270종일지도 모른다. 1월 1일의 주인공은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다. 두개골과 아래턱뼈 네 조각 그리고 치아 몇 개 남은 게 전부다. 하지만 머리와 몸통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봐 유인원보다는 현생 인류에 훨씬 가깝게 보인다. 시작은 언제나 느린 법이다.

거의 반년이 지난 5월 20일에야 새로운 인류가 등장한다. 아르피디테쿠스 라미두스(일명 ‘아르디’)다. ‘아르디’는 발바닥이 단단해서 두 발로 걸을 수 있었다. 여름이 되자 진화가 빨라진다. ‘루시’란 이름으로 유명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7월 15일에 나온다. 루시는 두 발로 걸었다. 인류는 제대로 서서 걷는 데만 인류사의 절반 이상을 소비했다. 이때 두뇌의 크기는 침팬지와 비슷하고 현생인류의 3~4분의 1에 불과하다.

왜 두뇌가 커졌을까? 물론 직립을 하면서 척추 위에 두개골이 안정적으로 놓였기 때문에 뇌가 커질 수 있는 조건은 형성됐다. 하지만 두뇌가 커진 이유는 따로 있다. 굶주림이다. 인류에게 굶주림은 최근 수십 년을 제외하면 일상이었다. 굶주린 배를 채우는 데 늘 어려움을 겪는 동물의 세포는 노화 속도가 느리다. 결핍을 감지한 몸이 에너지를 절약하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때문이다. 굶주리면 모든 세포의 성장이 느려진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 뇌세포만은 더 빠르게, 더 많이 성장한다. 굶주림은 동물에겐 끔찍한 상황이지만 비범한 새로운 자질이 진화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도 하다.

유년기 길어지면서 진정한 인간화
10월에 들어서면 인류 진화는 가냘픈 인간(gracile human)과 건장한 인간(robust human)이란 두 가지 경로를 걷게 된다. 건장한 인간은 위장이 매우 컸다. 먹고 소화시키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위장이 열심히 일하느라 뇌 성장에 에너지를 할애할 수 없었다. 가냘픈 인간은 상대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뇌 성장에 할애했다. 게다가 불을 사용할 줄 알았다. 불로 요리하자 예전에 먹지 못하던 것도 먹게 됐고 음식을 보관하기도 편해졌으며 소화하긴 더욱 쉬워졌다. 그러자 뇌가 커지면서 더 효율적인 무기를 만들었고 전략적으로 사냥했다. 그 결과 더 많은 음식, 더 많은 단백질, 더 풍부한 문화로 이어지는 선(善)순환이 일어났다. 인간의 뇌는 두 배로 늘어났다.

모든 일엔 양(陽)과 음(陰) 두 가지 측면이 있는 법이다. 직립과 두뇌 성장은 여성에게 출산의 고통을 안겼다. 똑바로 서면서 산도(産道)가 좁아졌는데, 태아의 두뇌는 오히려 커졌기 때문이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아기를 세상에 빨리 내보내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고릴라 새끼처럼 성숙해 세상에 태어나려면 여성의 임신기간은 20개월로 늘어나야 한다. 가냘픈 인간은 세상과 맞설 준비가 되지 않은 아기를 세상에 내보냈다. 이것을 유형성숙(幼型成熟·neoteny)이라 한다.

11월이 되자 건장한 인간들은 모두 멸종했다. 가냘픈 인간은 호모 에르가스터와 호모 하이델베르겐스로 이어졌다. 11월 19일엔 네안데르탈인이 나타났다. 12월 21일이 되자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했다. 12월 26일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탈출했지만 서남아시아를 벗어나진 못했다. 29일 다시 아프리카를 벗어나 이번엔 유럽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12월 30일 정오쯤 되자 네안데르탈인도 사라졌다. 그후 지구엔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아 개체 수가 자그마치 71억 명이 넘는 군집을 이뤘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키는 조금 작았지만 몸은 더 다부졌고 뇌도 더 컸다. 지구에 살았던 그 어떤 인류보다도 힘이 세고 강인했지만, 그들은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 왜 우리는 남고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을까? 동물을 봐도 사자와 호랑이, 흑표범과 퓨마는 공존한다. 고릴라·오랑우탄·보노보·침팬지 역시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도 인간은 오로지 한 종류뿐이다. 왜 그럴까?

유형성숙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유형성숙이란 ‘성체(成體) 동물이 유체(幼體)의 특징을 보유하는 것’을 말한다. 인류는 진화과정을 통해 후손에게 유년기를 연장하는 방법을 물려줬다. 인류는 일찍 태어나 유년기가 길어졌다. 인생 전체에서 유년기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앞선 유인원들과는 더욱더 다른 길을 가게 됐다.

네안데르탈인, 유년기 짧아 인지력 낮아
유인원의 경우 성체가 되면 사라지는 유년기의 특징이 인간의 경우 죽을 때까지 남아 있는 게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의 납작한 얼굴과 높은 이마는 새끼 침팬지와 비슷하다. 인간의 몸에 털이 적은 것도 새끼 유인원과 닮은 점이다.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개체발생과 계통발생』에서 “인간의 고유한 유형성숙이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방향 전환 중 하나였다”고 결론지었다. 굴드는 유형성숙 덕분에 “한 번에 한 명씩의 출산, 부모의 정성스러운 보살핌, 긴 수명, 늦은 성숙, 높은 수준의 사회화가 가능해졌다”고 덧붙인다. 유년기가 길면 길수록 사회적 학습능력이 커진다.

네안데르탈인은 유형성숙이란 효과적인 전략을 나중에 잃어 버렸다. 수명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네안데르탈인은 점점 더 빠르게 자라나 최단 시일 안에 성인의 체격과 체력을 갖추며 가능한 한 빨리 아이를 낳고 일찌감치 비어 있는 연장자의 자리를 채워야 했다. 어린 시절이 사라진 것이다. 유년기는 놀면서 배우고 사회성·창의력을 개발하는 귀한 시간인데 네안데르탈인에겐 이 시기가 짧았다. 유년기를 잃어버린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에 비해 인지능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린 구성원에게 지혜를 전수할 어른도 줄었다. 그들은 당장 생존 유지에 급급해야 했다.

그렇다면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의 유형성숙 전략의 차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왜 네안데르탈인의 수명은 짧았을까?

4만5000년 전 2만 명에 이르는 네안데르탈인은 대서양에서 우랄 산맥에 걸쳐 소수 가족 단위로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았다. 그들이 일생 동안 마주친 동족(同族)의 수는 기껏해야 수십 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배우자를 찾기 위해 잠깐 만난 것이 전부였다. 그들에게 무기란 불에 천천히 말려서 단단해진 나무로 만든 무거운 창과 나무 몽둥이뿐이었다. 그들의 창은 던지는 게 아니라 찌르는 무기였다. 이에 비해 호모 사피엔스의 창엔 석촉이 달려 더 치명적이었다. 가벼워서 15m까지 던질 수 있었으며 투창기를 사용하면 61m까지 사정거리가 늘었다. 이 창으로 호모 사피엔스는 작은 크기의 짐승을 포함해 다양한 종의 동물을 사냥할 수 있었다.

크로마뇽인(호모 사피엔스)이 발명한 ‘바늘귀가 있는 바늘’은 인류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발명품이었다. 이 발명품이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의 운명을 갈랐다.

어린 시절 다양한 놀이가 생존의 힘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가 함께 번성하던 시기는 마지막 빙하기의 후기 시대였다. 당시 유럽은 살인적인 추위로 가장 잔혹했던 환경에 놓여 있었다. 겨울이 6~9개월에 달했다. 네안데르탈인은 수십만 년 전부터 유럽에 뿌리내리고 살던 토착민이다. 그런데 이들보다 따뜻하고 건조한 서남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이동한 호모 사피엔스들이 혹독한 추위를 오히려 더 잘 견뎠다. 호모 사피엔스에겐 비장의 생존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도구를 발명했다. 바로 ‘바늘귀가 있는 바늘’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서남아시아의 온화한 환경에선 솜씨 좋은 목공이었다.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나무 대신 뿔과 뼈를 사용했다. 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작은 끌로 뿔과 뼈에서 쓸 만한 조각을 잘라낸 다음 그것들을 손질해 가는 바늘을 만들었다. 그리고 바늘에 바늘귀를 뚫었다. 그들은 가죽 끈을 실로 사용했다. 여인들은 바늘을 사용해 늑대·순록·북극여우 같은 다양한 짐승의 털과 가죽으로 옷을 만들었다. 옷은 급격히 변화하는 환경에서 동상이나 저(低)체온증의 위험을 줄여 주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은 바늘귀가 있는 바늘을 발명하지 못했다. 그들은 옷을 지어 입지 못한 채 가공하지 않은 두꺼운 털옷을 몸에 걸치고 가죽 끈으로 묶는 게 전부였다. 매일매일 동상과 저체온증을 걱정해야 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그들의 수명은 점차 짧아졌다. 인구가 줄었으며 유년기도 덩달아 단축됐다. 짧아진 유년기는 낮은 사회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됐고 결국 멸종에 이르렀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모든 인류를 제치고 유일하게 살아남아 엄청난 개체군을 유지하게 된 데는 더 발전한 사냥 무기, 강화된 인지능력 그리고 효율적인 의복의 도움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의 배후엔 긴 유년기의 ‘놀이’와 ‘바느질’이 있었다. 놀이와 바느질이야말로 인류의 최첨단 기술인 셈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아이들에게 놀 시간을 주지 않고 바느질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러다가 네안데르탈인의 길을 따르지 말란 법도 없다.



이정모 연세대 생화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본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나 박사는 아니다. 안양대 교양학부 교수 역임. 『달력과 권력』 『바이블 사이언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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