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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요환의 배틀배틀] 싱겁게 끝난 '임진록'에 야유하던 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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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스타크래프트 팬들은 항상 임요환과 홍진호의 대결을 기대한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IS팀 시절, 소속이 같은 동료였다. 또 공식 경기에서 가장 많이 마주친 선수이기도 하다. 라이벌 의식이 없을 리가 없다. 사람들은 임요환의 '임', 홍진호의 '진'을 따서 우리 경기를 '임진록'이라고 부른다.

2001년 코카콜라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결승전에서 그와 맞붙었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끝에 내가 3대 2로 승리를 거둔 명승부였다. 승패를 떠나 서로 최선을 다한 멋진 경기였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임진록 시리즈가 이어지길 기대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너무 잘 안다. 그래서 그와의 경기는 늘 심리전이다. 서로 상대의 마음을 간파해 전략을 꿰뚫어야 한다. 초반 빌드 싸움뿐 아니라 후반에서도 이런 심리전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그래도 상대를 너무 잘 알다 보니 늘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나온다. 그게 임진록의 묘미가 아닐까.

모든 임진록이 내게 훈장인 것은 아니다.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아쉬운 경기도 있었다. 2004년 EVER 스타리그 준결승에서 홍진호 선수와 마주했다. 팬들은 모두 드라마 같은 임진록이 펼치길 기대했다. 그러나 경기는 순식간에 끝나고 말았다. 내가 세 판을 연거푸 이겼다. 준결승 최단 시간 경기 기록까지 세웠다.

그러나 실망한 팬들은 내게 비판과 비난을 퍼부었다. 경기 초반에 마린과 일꾼까지 동원, 상대 진영의 앞마당에 벙커를 짓고 밀어붙이는 '벙커링'을 펼쳤기 때문이다. 똑같은 전술에 홍 선수는 세 번 다 무너졌다. 그러나 팬들은 나의 전술을 치사한 공격이란 뜻으로 쓰이는 '치즈러시'라고 불렀다. 하긴 단조로운 전술로 경기가 순식간에 끝났으니 팬들은 실망할 만도 했다. 그러나 내겐 아쉬운 경기였다. 나는 벙커링 이후의 전략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기가 일찍 끝나는 바람에 카드를 꺼낼 수가 없었다. 요즘은 벙커링에 대한 대처법이 나와 그런 전술을 쓸 수도 없게 됐다. 어쨌든 내겐 최악의 임진록으로 남고 말았다.

나는 홍진호 선수를 좋아한다. 그는 승리욕이 강하고 패배의 울분을 결코 내색하지 않는다. 자기 관리에도 철저하다. 실력의 하락세를 느끼자마자 연습에 매진하는 모범적인 게이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늘 프로답다. 프로게이머로서 갖추어야 할 유연한 성격과 성실한 습관을 제대로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늘 가장 중요한 대회의 결승전에서 임진록이 열리길 기대한다.

<프로게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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