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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어느 날 갑작스러운 기차사고, 고통이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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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모든 빛깔들의 밤
김인숙 지음
문학동네, 356쪽
1만3000원

세상 모든 슬픔의 뿌리는 결국 하나인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아픔에 같이 아파할 수 있고, 심지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끔찍한 불행도 예측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품게 만드는 소설가 김인숙(51)씨의 새 장편이다.

 소설은 2012년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 연재됐었다.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슬픔과 마음의 상처에 짓눌린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묘하게도 여러모로 세월호 사건을 연상시키는 대형 기차 사고가 소설의 배경이다. 만취해 자살하기 위해 철로에 드러누운 한 트럭 운전사를 발견하고 기차가 급제동하자 철로 지반이 무너져 내리며 기차가 전복된다. 인근 위락시설 공사로 인해 지반이 침하됐던 것이다.

 작가는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세월호 사건과 비슷한 사회구조적 비리를 사고의 원인으로 던져 둔다. 하청업체의 부실시공, 대기업의 관리소홀, 권력층이 관계된 공사 수주 비리…. 부패의 맨살이 양파 껍질처럼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피해자 가족의 슬픔은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다. 지난 봄 상황처럼 기시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소설은 사고 많은 세상의 불안함보다 그 안에서 갈팡질팡하는 인물들의 고통을 뭉클하게 전하는 데 집중한다. 절절한 상실의 아픔과 눈물을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듯 여리고 상처 많은 소설 속 인물들은 닥쳐온 불행에 격하게 반응한다. 깨지고 찢어져 눈물 흘린다.

 기차사고에서 채 돌도 되지 않은 아들을 잃은 희중과 조안 부부. 아내 조안은 심인성 기억상실·공황장애에 걸려 자살을 기도한다. 다정다감 원만한 인물 같던 희중은 고통이 극에 달하자 발작을 일으킨다. 조안의 ‘양아치 남동생’ 상윤은 누군가를 때릴때 맞는 상대에 대한 연민 때문에 눈물을 흘릴 만큼 상투적 건달과는 거리가 있다. 덩치가 산만한 웹툰 작가 백주는 자신의 큰 덩치에 열등감을 느낀다. 외모가 상처가 돼 연애 한 번 못한 숙맥이다.

 인물들이 이렇다 보니 소설은 자칫 눈물 쥐어 짜는 신파가 되기 쉬웠을 것이다. 노련한 작가는 잘도 피해 나간다. 무기는 추리코드와 유령이 등장하는 판타지적 설정이다. 희중이 광기에 사로잡혀 그토록 사랑하는 조안을 살해하려고까지 했던 데는 음침한 가족사가 도사리고 있다. 인물 각각의 행동의 정당성이 차츰 드러나는 촘촘한 과정이 추리소설을 읽는 것 같은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

 백주는 유령을 본다. 조안의 죽은 아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러다 조안이 자폐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안타까운 죽음이 끊이지 않는 세상, 우리 곁에는 억울한 유령들이 떠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물은 곧 우리의 눈물 아니냐고 소설은 묻는 듯 하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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