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남북대결(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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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제무대 데뷔전이라 할 수 있는 테헤란대회에서 한국에 분패(?)한 북한은 4년 후의 78년 방콕 제8회 대회에서 절치부심의 설욕을 노렸다.
그러나 4년이란 세월이 국가간의 종합스포츠판도를 뒤엎기란 쉽지 않은 것.
테헤란대회 때 나타난 바와 같이 북한이 사격과 역도 등 소수 종목에서 집중적으로 금메달을 수확한 것과 대조적으로 한국은 육상·수영·체조·펜싱·레슬링·테니스·사격·복싱 등에서 고루 금메달을 따냈고 남북직접대결을 벌인 배구·탁구가 모두 우세, 폭넓은 저력을 과시했다. 이러한 스포츠의 깊은 뿌리가 한국의 강점이었다.
78년12월20일은 방콕대회가 폐막되는 날이다. 이날 평양방송들은 실소를 자아내는 허위방송을 해댔다.
『17일 현재 북한이 금18, 은13, 동메달 17개를 획득, 일본 중공에 이어 종합3위를 확보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최종적인 금메달 수는 l5개에 불과했다.
방콕대회에서도 북한은 초반에 사격과 역도를 내세워 세차게 기선을 제압했다.
사격에서 6개, 그리고 역도에서 경량급의 세계정상인 한경시 (52kg급)를 비롯, 3명이나 우승을 차지한데다 육상 여자장거리의 독보적인 존재로 등장한 김옥순이 2관왕 (1천5백m·3천m)이 되는 등 한국보다 금메달수가 10여 개나 앞서나갔다.
한국은 대회일정이 반이나 지나도록 금메달이 단 1개도 없다가 폐막 5일전엔 사격 (박종백), 레슬링(양정모), 역도(안지형), 사이클(이관선)의 분발로 겨우 금4개에 머물러 있었다. 이 참담한 약세가 폐막 4일을 남기고 일대 변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치 대기만성의 저력을 과시한 것이었으나 당시 한국선수단의 임원들은 처절한 패배감에 사로잡혀 비탄에 빠졌고 국민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궁도의 김진호가 한국에 분기의 기수로 나섰고 이어 펜싱플러레 단체 (차율·김두경·김국현·김헌수)가 뜻밖에 금을 선사했다. 또 볼링의 안병구, 여자테니스복식의 양정순·이덕희,사이클 단체추발의 이종문·신남수·이관선·박일우가 잇달아 우승고지를 통괘하게 정복, 한국진영은 재기와 역전의 희망에 들떠 용기백배 했다.
그리고 마침내 폐막사흘 전 이덕희가 단식마저 제패하고 전가의 보도 복싱이 기대대로 황철순·최충일·김인창·황충재·박일천 등 5명을 금메달리스트로 올려놓아 또다시 감격적인 역전극을 성취했다.
그 이튿날 여자농구의 중공 제압, 남자배구의 어부지리우승 (중공이 일본을 눌러 세트득실차 우세)으로 북한의 추격에 쐐기를 박았고 최종일 축구에서 북한과 우승을 반씩 나눈 것은 여흥(여흥)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결국 한국은 금18-15로 북한을 다시 제압했고 격차를 오히려 더욱 벌려놓았다.
북한공산폐쇄사회의 통제스포츠가 자유스럽고 자연발생적이며 다양 속에 조화를 추구하는 한국의 개방스포츠를 결코 능가할 수 없음을 방콕대회가 재확인한 셈이었다.
한편 남북 직접대결에서도 별표와 같이 한국이 4승1무3패로 우세했다. 패한 것은 모두 복싱인 점이 여운을 남긴다.

<박군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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