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4>-제79화 육사졸업생들(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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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일본군에 근무하는 한인 장교들은 일본인들의 노골적인 한인멸시를 직접보거나 거기에의 동조가 강요되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1936년 안성에서 조선주둔 일본군이 야외훈련을 한 적이 있었다. 훈련을 마치고 사단장이라는 자가 장교들을 모아놓고 강평을 했다. 『연습시에는 농작물에 피해가 없도록 하라. 여러분은 조선인의 논밭이라고 기분좋게 밟아버렸을지 모르나 그 가운데는 우리 일본인의 소유가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서울의 조선군사령부산하에 제19,20 등 2개사단을 배치했다.
함북 나남에 본부를 둔 19사단의 2개연대는 나남과 함흥에, 그 분견대를 희령에 전개하고 있었다.
용산의 20사단은 77연대를 평양, 78, 79연대를 서울에, 80연대는 대구에 배치하고 그 분견대를 대전에 두고있었다.
일본육사 26기인 이응준장군은 79연대, 신태영장군은 80연대, 27기인 김석원장군은 78연대, 남시현선생은 대전의 대대에 배치된 적이 있었다.
일본은 만주나 중국에서 침략전쟁을 벌일 때 마다 조선주둔부대들을 투입하곤하여 이들은 자주 출경했었던 것이다.
이응준장군이 시베리아에 출정했을 때 기차여행을 한 적이 있다. 옆에는 일본인 기자 1명이 타고 있었다.
3시간을 달리는 동안 역마다 상투를 틀어 올리고 수건으로 머리를 동인 한국인 노무자들이 눈에 띄었다. 언뜻 보기에도 차림새와 모습이 비참했다.
옆에 있던 일본기자가 『저런 주제에 무슨 독립을 하겠다고』라고 조소했다. 이장군은 나쁜 놈이라고 생각됐지만 그 말을 묵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중일전쟁 때 이응준장군이 산동반도에 있는 일본 북지군의 청도 교육대대장으로 있을 때였다. 피교육자 1천5백명 중 조선인출신이 3백여명 있었다.
이장군은 외국에 의해 외국전선으로 끌려나온 동족청년들을 자신이 거느리게 되어 기분이 좋았고 우리 청년둘도 마음 든든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조선주둔군사령부에서 만들어 보낸 조선출신 장정들에 대한 교육자료가 내려왔다. 각 교관·단위대장에게 배포하라는 비밀자료였다.
그 내용은 조선인의 장단점을 열거한 것인데 16개항목 중 장점은 성품이 순하다, 연장자를 위한다는 2개항뿐이었다.
나머지를 간추려보면 파벌을 짓는다, 거짓말을 잘한다, 도벽이 심하다, 게으르다, 참을성이 없다, 뇌화부동을 잘한다, 불결하고 비위생적이다, 의타심이 많다, 면전복배를 잘한다, 검소하지 못하다, 저축심이 없다, 용기가 없다, 허식이 많다 등이었다.
이장군은 분노가 복받쳐 올라왔지만 상부명령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군 사령관으로 와있던「우쓰노미야」 (우도궁태랑) 대장은 개인적으로는 그 성품이 좀 달랐던 것 같다.
그는 일본에서 근무하다 휴가왔던 김석원중위가 그를 찾아간 자리에서 조선근무를 하고싶다고 말하자 78연대로 쾌히 끌어주었고 때때로 자기사무실로 불러 애로사항을 묻기도 하고 여러가지 말로 위로를 해주었다.
우도궁대장은 당시 그와 가까이 지내던 박영효를 김장군에게 소개해 주어 두분은 각별한 사이가 됐다. 김장군은 자제분 3남이 있는데 원래의 돌림자를 버리고 박영효의「영」자를 따서 영철·영수·영국이라고 이름을 짓기도 했다.
이응준장군은 장인인 독립운동가 이갑선생이 망명지에서 객사했고 3·1운동으로 조국의 상처도 크고 하여 심신이 불편하던 차에 신병까지 얻어 제대신청을 낸 일이 있었다.
우도궁대장은 이를 알고 이장군을 조선군사령부로 전출시켜 무보직으로 두어 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하는 한편 사령부 안에 방도 내주어 나와서 쉴 수 있게 했다.
그는 점심을 꼭 집에서 가져오게 하여 사무실에서 들었는데 때때로 이장군 (당시중위)을 불러 같이 들었고 퇴근길엔 이장군 사무실에 들려 『나 먼저 가네』 하기도 했다는 것. 병을 얻어 본국으로 전임하게 됐을 때의 어느 일요일엔 사복을 입고 마차를 타고 이장군집에 예고도 없이 찾아와 『차나 한잔 주게』 하고는 함께 마시며 석별의 정을 나누고 갈 정도로 자상했다.
그는 『일본인의 언동에 불쾌할 때가 많은 줄 아나 참아주기 바라네.』하며 미안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국회의원으로 북괴를 드나들면서 반한책동을 벌여 온 「우쓰노미야도꾸마」 (우도궁덕마)라는 자는 바로 그 사령관의 아들되는 자다.
우도궁사령관은 서울근무 때 자녀를 일본에 둔 채 부인만 데리고 나와 있었다. 그는 건강때문에 동경으로 귀임했으나 끝내 회복치 못한 채 얼마 후 사망한 것으로 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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