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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진초당사건(33)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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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죽산은 공산당을 이탈했지만 그 망령이 주변을 맴돌았다고나 할까. 6·25전란이 일어나고 죽산은 최후의 도강팀에 끼어 늦게서야 대전에 도착했다. 그가 충남지사관저로 이대통령을 찾아 갔을 때다. <이거 죽산아니야. 방금 얘기를 들으니까 서울시 인민위원장이 됐다던데….>놀란 얼굴의 대통령의 첫마디였다. 적치하에 들어간 서울거리엔 「반역자 조봉암을 처단하라」는 벽보가 붙어 있었는데도….

<사상전향을 의심>
죽산은 김구·김규식등 상해임시정부 주류파조차 반대한 남한단독선거에 참여했다. 그럼에도 일부 보수우파, 특히 한민당계열은 그의 사상적 전향을 의심하고 경계했다. 죽산과 한민당계 사이의 불신과 대립은 그의 농정에서 싹텄다. 그가 초대 농림장관으로 기용됐을 때 찬성과 반대가 뚜렷이 갈라졌다. 한민당계는 「공산주의자를 농림에 앉히다니…」라는 반발이었고 소장파의원들은「농정혁신의 의지가 나타난 대통령의 결단」이라고 찬양했다.
조농림이 편 농정의 기본은 양곡매입법, 농지개혁법, 농민의 조직을 위한 지도사업(농협 구상), 그리고 농민신문 발행등이다. 이 정책들은 조농림다운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대통령의 뜻도 담겨 있었다. 농민을 계몽하고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 공산당을 막는 길이라는 대통령의 확신이 과감한 농촌개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런 개혁정책은 지주층을 기반으로한 한민당에는 모두가 달갑쟎은 정책들이었다. 한민당계는 국회에서 줄곧 농정을 공격했다.
조농림 비서였던 강원명씨(현재태평양화학 고문)의 회고.
『내가 죽산과 인연을 맺게된 것은 제창국회 선거 때였다. 중국 국민군에 배속돼 있다가 해방 후에 귀국한 나는 족청의 인천지구 부단장을 맡고 있었다. 선거가 시작됐는데 족청계는 없고 후보자중에는 죽산이 제일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본부로 와서 이범석씨에게 죽산을 돕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장군은 <죽산은 공산당이야, 안돼>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 결국 중앙의 승인은 못받았지만 내 판단에 따라 인천지구 족청은 죽산을 도왔다.
그러다 이범석씨가 총리 지명을 받게되자 내게 죽산설득을 부탁했다. 죽산에게 가서 얘기했더니 <그 사람은 파시스트주의자야>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죽산이 농림장관을 맡게되자 비서로 들어갔는데 국회에 어지간히 불려다녔다. 한민당의「극성스런 반대 때문이었다. 당시 조농림은 농촌계몽강연을 많이 다녔는데 농민의 지지가 대단했다. 결국 그의 개혁정책과 인기가 한민당에는 눈의 가시가 됐다.
한민당은 소위 장관관사 수리비와 농민신문에 대한 보조금을 문제삼아 감찰위원회로 하여금 조농림을 고발케 하여 해임시켰다.
6·25가 일어났을 때다. 죽산은 국회부의장이었다. 우리는 신성모국방장관의 큰소리를 믿었다. 27일 낮에 국회로 나왔더니 의원들이 안절부절못했다. 국방장관실에 연락했더니 신장관은 없었다. 내무장관실로 갔더니 텅빈 청사에 백성욱내무 혼자 버티고 있었다. 정부는 수원으로 옮기기로 했다면서 우리더러 피난하라고 했다.

<죽산부인은 납북>
부의장실로 돌아와 피난준비를 했다. 국회사무처에서 5천만원을 마련해와 의원들에게 1백만원씩 나눠주고 사무처에 지시해 중요문서를 옮기도록 했다.
국방부에 차량지원을 부탁했는데 한강교를 폭파할 계획이니 빨리 도강하라는 얘기였다. 죽산은 군당국에 중요문서운반등 작업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폭파를 늦춰달라고 하고 국회와 정부의 중요문서 일부를 옮겼다. 정신없이 뒤처리를 끝내고 나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내가 집에 들러서 가야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모두들 피난도 못 갔는데 내 가족만…>하면서 곧장 한강으로 나갔다.
한강에 도착하니 이미 헌병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수원에 도착해보니 정부는 대전으로 가고 없었다.
그날 밤을 수원에서 보내고 다음날 대전으로 갔다. 죽산이 대통령을 만나러 충남지사관저로 곧장 갔다. 그랬을 때 대통령의 첫마디가 <인민워윈장이 됐다더니…>라는 말이었다.
죽산이 끝내 안보이니까 서울에 처진 것으로 단정했던 것 같다.
우리가 대통령방 앞에 막 도착했을 때 보고를 끝내고 나가는 장경근국방차관과 마주쳤는데 죽산의 인민위윈장설은 장차관이 전한 것으로 보였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대전에선 유엔참전소식에 희망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허둥지둥 피난 온 국희의원과 요인들은 신성모인책론으로 들끓고 있었다. 해공·죽산등 국회의장단은 대전에 피난 온 의원들로 회의를 열어 국방장관인책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국방장관해임 건의안은 최원봉의원이 맡았다.
그런데 이 논의가 한밤중의 피난소동을 일으켰다. <정부는 대전을 떠난다. 국회의원등 요인은 모두 대전역으로 나오라>는 한밤중의 비상이 걸린 것이다.
이리하여 영문도 모른 채 한밤중에 대전역에 나온 국회의원과 재야요인들은 열차편으로 호남선을 따라 전주까지 내려갔다가 대전으로 되돌아왔다. 이 소동은 국회의 인책공세를 중지시키기 위해 국방장관이 꾸며낸 정치곡예의 산물이었다.
죽산은 대전에서부터는 순조롭게 정부를 따라 남하했다. 그는 피난수도 부산에서 이대통령의 협조자였다. 서울이 수복돼 돌아와 보니 죽산의 부인 김조이여사는 납북되고 없었다. 김여사 역시 모스크바 동방공산대학출신으로 일제때는 감옥살이도 한 좌파였다.
김여사는 서울이 점령되고 「반역자 조봉암」이란 벽보가 나붙자 친지집에 피신해 몸을 숨겼는데 7월하순 저녁나절 피신처가 탄로나 체포됐다는 것.
국군이 북진하고 이대통령이 수복된 평양을 방문할 때 죽산을 동행하도록 했다. 평양에 가서 부인의 생사여부라도 확인해보라는 이대통령의 배려였다.
중공군개입으로 전선이 다시 남하해 두번째로 부산에 갔을 때 대통령은 정당배격론을 청산하고 신당창당을 구상했다. 이 때 대통령은 죽산을 불렀다. <죽산, 민국당은 지하정당이야. 농민·노동자를 대변하는 농민당이나 평민당같은 걸 만들어야 해. 이 일을 죽산이 맡아보지 않겠나.> 그러나 죽산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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