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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해외 칼럼

동아시아의 역사 망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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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올해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지 100년,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되는 해다. 일본의 군사력은 예전처럼 동아시아에서 압도적으로 월등하지 않다. 그러나 역사의 망령은 아직도 동아시아에 드리우고 있다. 각국은 과거사 문제로 다투고 있다.

▶ 안토니오 장춘난 전 대만 국가안보회의 사무차장

수세기에 걸쳐 일본과 중국은 동아시아를 번갈아 가며 제패해왔다. 지금도 양국은 지역 패권을 두고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두 라이벌 국가의 쟁패장이었다. 현재 남북한은 평화 정착을 추구하고 있으며 한국은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6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중국은 한국을 100차례 이상 침략했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 중국은 충격을 받았다. 중국은 스스로를 일본 침략의 피해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웃 국가들을 침략한 사실을 잊어버렸다.

노 대통령은 또 일본이 전쟁범죄를 저지른 역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서 이 때문에 일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진출할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일본은 한국을 오랫동안 식민지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한국인들이 강제로 일본 제국군에 끌려갔다. 중국과 일본이 한반도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동아시아 정국을 보는 핵심 포인트다.

청나라와 러시아를 패퇴시킨 뒤 일본은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 동북지역까지 진출했다. 일본 관동군은 1932년 중국 동북지방에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은 괴뢰 만주국이 영국의 인도, 프랑스의 알제리와 같은 역할을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일본은 이곳에 100만 명을 이주시키고 중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엄청난 자본을 투자했다. 이주민 100만 명 중 80만 명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가 만주국을 차지한 뒤 희생됐다.

역시 일본의 꼭두각시 정권인 중국의 난징(南京) 정부는 독일 나치가 프랑스에 세운 비시 정권과 성격이 같았다.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은 모두 반역자 취급을 받았다. 장기간 식민 통치를 받은 한국과 대만은 일본에 저항하거나 협조했다. 극히 적은 예를 제외하고는 엘리트들은 식민체제에 동화됐다.

일본 패전 후 중국에서는 내전이 일어났고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됐다. 태국을 제외한 다른 동남아국가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군부에 의존했다.

중국은 아직도 만주국의 역사를 외면한다. 한국전쟁에 100만 명의 중국 군인을 파견한 마오쩌둥의 결정에 관한 비밀 문서에 대해서도 그렇다. 한국은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노동자 문제를 놓고 최근에야 일본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일제를 위해 목숨을 빼앗긴 2만 명의 대만인과 그 비슷한 수의 한국인이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서 참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전후 대일 보상 요구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악을 선으로 갚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공산당과 맞서기 위해 비밀리에 전 관동군 참모총장의 도움을 받았다. 일본은 대만에 대한 식민지배를 사과하지 않았다. 대만인은 30년 동안의 비상계엄하에서 역사를 돌이켜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올 봄 반일시위가 중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양국은 일본의 군사지배 역사를 새로운 민족감정을 일으키는 데 이용했다. 5월 유럽에서 거행된 종전 60주년 기념행사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아시아의 8.15 태평양전쟁 종전 기념행사는 아직도 잔존해 있는 역사적 민감성을 드러냈다. 유럽과 달리 아시아에서 역사의 기억은 지금도 각국의 전략적 야망과 관계가 있다.

100년 전 일본의 군사적 부상은 아시아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60년 전 일본의 패망은 다시 아시아의 운명을 갈랐다. 중국이 경제.군사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오늘날 아시아는 역사의 망령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다.

안토니오 장춘난 전 대만 국가안보회의 사무차장
정리=한경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