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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세」전철이 두려웠다|실명제 정기론의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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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하경제를 뿌리뽑을 때까지 예외나 수정도 있을 수 없다던 실명제가 의외로 심각한 부작용에 밀려 진통을 겪고 있다.
우리 경제가 그 규모나 구조면에 있어서 상당히 성숙된 단계에 도달되었기 때문에 국민경제의 운용이 보다 시장경제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며 이 시장경제는 모든 거래의 정상화를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실명제 실시의 근본 취지였으나 예상이상의 충격과 부작용을 수용할 묘안을 발견하지 못해 연기될 추세에 있는 것이다.
정부가 7·3조치를 내놓게 된 것은 지난 5월 장여인의 거액어음사기사건으로 사회가 벌컥 뒤집힌데 연유한다. 차제에 비정상적으로 흘러다니고 있는 금융자산을 노출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며 이를 위해 금융거래의 실명제 전면실시와 이자·배당소득에 대합 종합과세제를 채택했다.
6·28조치에서 공금리를 대폭인하한데 이어 실명제실시와 함께 법인세·소득세 등도 내려 세부담의 형평을 기하려 했다.
금융질서의 정상화와 지하경제의 양성화를 통해 정체없는 검은 돈을 모두 노출시킨다는 것이었다.
혁명적인 수법으로 경제적·사회적부조리를 일시에 뿌리뽑겠다는 구상이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옳고 또 많은 공감을 얻었다.
사채나 이자놀이를 하여 떼돈을 번 것에 대해선 세금이 안걸리고 성실하게 번 돈만 무거운 세금을 문다는 모순을 시정할 수 있다는 취지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명제가 지향하는 바와는 달리 여러 부문에서 부작용이 나타났다. 충격의 반작용으로 주식시장이 침체국면으로 치닫고 은행에서 빠져나온 돈이 개포지역의 아파트 등 투기쪽으로 몰렸다.
금리인하의 영향을 받은 탓이기도 하지만 실명제의 충격으로 돈의 흐름이 엉뚱하게 되어 경제운용자체를 위험하게 할 사태를 빚었다. 그래서 여당인 민정당쪽에서부터 수정·보완론이 제기된 것이다.
우선 실명제의 원안의 한 기둥이었던 종합과세방침이 삭제 됐다.
정부는 이 수정안에서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으나 민정당은 다른 차원에서 이 제도 실시의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
지난 77년 부가세실시로 78년 총선거에서 큰 타격을 받았던 공화당의 전철을 다시 밟을 수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실명제 수정안이 나온 이후에도 이상현상은 여러 군데서 나타났다. 지난 9월말 현재 화폐발행액 누계는 2조8천5백27억원으로 작년 동기보다 43.1%나 늘어났다. 올들어 9월까지 한은에서 새로 찍어낸 돈은 6천4백73억원, 9월중 추석이 끼어 현금통화의 유통이 늘어나긴 했지만 실명제의 충격으로 여차하면 실물투기에 쓰일 자금으로 대기하고 있다.
올들어 지난 25일까지 금융기관의 총예금 증가액은 2조8천8백억원으로 이중 아무때나 꺼내 쓸 수 있는 대기성자금인 요구불예금은 1조1천억원. 실명제가 발표된 지난 7월 이후 요구불예금이 옛날보다 많이 증가하는 추세를 꺾지 못하고 있다.
지난 6월 29일 증권시장의 종합주가지수는 1백75.5를 최고로 점차 내려앉기 시작, 실명제 연기론이 나돈 가운데서도 28일 주가는 1백64.8에 머물렀다.
아파트로 몰려간 대기성자금이 투기붐을 조성하자 정부가 세무조사강화를 발표하기까지 했으나 이에 아랑곳없이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아파트거래에 1천만원대를 넘는 프리미엄이 오가고 있다. 골프회원권의 값이 오르거나 국내외 금리차를 이용한 암달러 매입현상은 실명화에 따른 노출을 피하고 저금리속의 마땅한 투자대상을 찾지 못한데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은폐된 지하경제의 베일을 벗기려는 금융제도가 그 개혁 과정에서 마찰을 빚을 수 있으나 그것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치지 않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눈덩이처럼 커져 당초 의도와는 다른 왜곡된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는 우려가 많은 것이다. 또 실명제를 부작용 없이 치룰 행정적 준비와 수용태세도 미흡하다. 그래서 마지막 단계에서 진통을 겪고있는 것이다.
시행착오는 없는 것보다는 못하다. 강행에서 오는 부작용은 본래의 취지를 저버리기 십상이다.
이를 단계적으로 실시하면서 실물경제 각 부문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보완해 나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 금융구조를 아는 관계자들의 의견이다.
금융단 협정을 통해 우선 내년 1월부터 신규예금부터 실명을 쓰도록 하고 이를 연차적으로 확대하는 방법도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최철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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