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 '생각은 날마다 나를 새롭게 한다' 펴낸 화가 김형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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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혜밴드'의 가수, '너, 외롭구나'의 작가, 다섯 번의 개인전을 연 화가, 연극 '햄릿'의 배우, 홈페이지 '더김닷컴(www.thegim.com)'의 카운슬러…. 김형태(40.사진)씨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살아왔다. 스스로 "끝내주게 놀았다"고 말한다. 요즘도 무규칙 예술단이라고 부르는 '극동삼인방'을 결성해 나이가 무색하게 논다. '삼인방'의 한 사람인 소설가 박민규씨는 김형태씨의 진짜 정체를 '생각하는 사람'이라 한다.

"생각하는 시간이 길고 양이 너무 많아서 한가지로 풀어내기에는 넘쳐흐른다. 이 생각은 글로, 저 생각은 노래로, 또 다른 생각은 그림으로 간다. 여러 가지 일을 하니 서로 보완하는 효과가 있다. 한 군데 파묻히지 않아 좋다."

생각에 미친 그답게 새로 펴낸 책 제목도 '생각은 날마다 나를 새롭게 한다'(예담)다. 재능보다는 정성으로 그린 그림, 지식보다는 지혜에 의지해 엮은 '김형태의 생각도감'이다. '생각도감'은 3부로 이뤄졌다. 1부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과 우리가 지켜야 할 것에 대해 쓴 '세(世)', 2부는 집을 화두로 가족.사회.국가.우주로 생각을 넓혀가는 '가(家)', 3부는 '나를 행복하게 것은 무엇일까' 바라본 인(人)이다. 각기 김씨가 지닌 신념과 애정과 희망을 말했다. 글도 찰지지만 곁들여진 그림에 더 시선이 오래 머문다. 화가 김형태가 돌아왔다.

"미술이 좋았다. 홍익대 회화과에 들어갔을 때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현대미술에 심취했다. 설치미술과 행위예술, 난해하고 파격적인 표현 방식을 동원한 내 작업이 선배의 칭찬과 주목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개인전에 온 내 가족이 화랑 한구석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비켜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 과연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일까. 나는 미술계를 떠났다."

스물다섯 살 때 강원도 문막 비어있는 농가로 들어갔다. 자극적인 그림, 빨리 유명해지려 발악하던 그림에서 벗어나는 데 2년이 걸렸다. 논과 밭에서 일하는 농부를 보면서 그처럼 그림만 그렸다. 그 농부가 아무 설명 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할 수 있는 그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너지가 넘치던 젊은 시절에 담담한 마음의 그림을 그리려니 벅차고 억지스러웠다. 20대는 생각하는 속도가 빨라 바로바로 비워줘야 한다. 붓질은 오래오래 쌓아가는 것이다. 미술은 시간의 기록이고 비물질의 물질화다. 명료한 마음의 상태를 물질로 남기는 것이다. 인생의 연륜이 쌓인 다음에 해야겠다는 깨달음이 왔다. 그림은 한 마흔쯤 돼서 하면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미술을 떠났다. 이제 마흔 고개에 왔다. 화가는 내 숙명이다."

김씨는 "어느 날 무심한 마음으로 참 심심한 그림 하나를 그렸는데, 어머니에게 '얘야, 이 그림은 왠지 모르게 내 방에 걸어두고 싶구나'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정말 다행일 것"이라고 말했다. 화가로서의 그의 희망은 여기까지다. 9월 2일부터 16일까지 서울 동숭동 갤러리 정미소에서 여는 개인전에서 그의 희망을 볼 수 있다.

"인생은 숙제다. 선택의 문제를 떠나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한다. 나와 세상과 세상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 헤매는 것이 나의 자기 관리 방식이다." 그는 "세상을 1센티미터만 전진시키면 된다"고 믿는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지만 그 '1센티미터'에 모든 것이 있다고 '김형태의 생각도감'은 말한다.

글=정재숙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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