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 회고록『신의를 지키며』…국제 독점연재(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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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가 해야할 다음 단계의 조치는 무엇인가? 누구나 동의하고있는 하나의 가설은 많은 국가가 참여하는 제네바회담과 같은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차우세스쿠」루마니아대통령과 프랑스의「레이몽·바르」수상이 편지를 보내 강경파 아랍국가들이 참여하도록 협조하겠다고 의사표시를 해왔다.
「사다트」대통령은 국제평화 회의를 카이로에서 개최할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랍국가들이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자 제네바 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카이로회의를 열자고 수정 제안했다.
소련과 다른 아랍 국들이 그 제안마저 거부했다. 오직 우리 3명, 「사다트」와「베긴」그리고 나 셋만이 참석하기로 동의했다.
나는 다른 아랍 지도자들이 우리에게서 멀어져 친소 쪽으로 돌아서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밴스」국무장관에게 주요아랍 국가들을 방문하고 우리가 포괄적인 중동평화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알리라고 지시했다.
「사다트」의 이스라엘방문은 이스라엘을 고립시켰던 아랍의 쇠사슬을 끊어놓았다. 평화회담을 위한 이집트와 이스라엘사이의 예비접촉이 몇 차례 있긴 했지만「사다트」와「베긴」만으로는 지금까지 서로 맞대 토의해 본 적 없는 근본적인 난제를, 즉 팔레스타인문제, 이스라엘 군의 점령지철수, 이스라엘의 안보, 평화의 정의문제 등을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두 지도자가 이 일을 하게 해 달라고 헌신적으로 기도했으나 진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사다트」와 다른 아랍지도자들은 미국이 중동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카이로회담 찬반 논>
77년 크리스마스가 지난 직후「사다트」와「베긴」은 이즈마일리아(카이로 동북방항구도시)에서 회동했다.
회담 후 두 사람의 회담결과에 대한평가는 정반대였다.「베긴」이 회담이 큰 성공이었다고 발표한데 반해「사다트」는 완전한 실패로 평화이니셔티브의 후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후 한동안 이렇다할 진전 없이 시간만 흘러가「사다트」의 역사적인 이스라엘방문이 오직 제네바평화회담만 무산시킨 결과가 되어버리는 듯 했다.
-우리는「사다트」에게 워싱턴으로 나를 방문해 달라고 초청장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주말 캠프데이비드산장이 좋을 듯하다. 만약 이집트와 이스라엘간의 군사·정치회담이 결렬된다면「사다트」와「베긴」두 사람 모두를 초청할 계획이다. (일기·1978년1월23일)
「사다트」대통령부처가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로절린」과 나는 그들을 캠프데이비드로 안내했다. 나는 그들이 백설이 덮인 산장일대의 장관을 즐겨주기를 바랐다. 그 생각은 나의 실수였다.「사다트」 대통령은 혹한에 건강을 무척 걱정하고 있었다.
이튿날인 2윌4일 아침 우리는「사다트」와 함께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사다트」는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이 이스라엘사람들을 당혹하게 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스라엘사람들이 평화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하다고 말했다.
이즈마일리아 회담에서「사다트」는「베긴」의 어리석은 입장과 태도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그는「베긴」수상이 온건한 입장인「다얀」외상이나「바이츠만 국방상의 충고를 거부하고「아리엘·샤론」농업상(현 국방상)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추위 못 견딘 사다트>
「샤론」은 요르단강 서안에 수십만 명의 유대인을 보내 대대적인 정착사업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사다트」는「베긴」이 평화를 바라지 않고 있다고 믿고있었다.
「베긴」이스라엘수상부처가 3월21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나는 저녁만찬 후 따로 사무실에서「베긴」과 1시간 반 동안 얘기를 나눴다. 그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사다트」의 이스라엘방문은 거대한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이집트는 팔레스타인독립국가의 창설과 이스라엘 군의 점령지 완전철수를 바라고있다고「베긴」은 주장했다. 나는 그에게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베긴」과「다얀」과의 회담(「베긴」방미이틀째-주) 에서 「사다트」와 내가 평화정착을 위해 만든 협상초안을 설명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이스라엘 군의 요르단강 서안으로부터의 완전철수를 요구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독립국가를 창설하지 않는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의 자치권을 준다 ▲협상으로 정해지는 안전지대로부터 이스라엘 군이 철수한다 ▲요르단강 서안의 서독경계선을 일부 수정한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정부는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의 통치권을 이양한다▲향후5년간 이 지역에 대한 주권을 두 나라가 주장하지 않는다 ▲5년 후 점령지에 살고있는 팔레스타인들이 투표에 의해 이스라엘 또는 요르단으로의 합병이나 「임시정부」의 존속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인정한다 ▲협상기간동안 이스라엘은 정착촌을 확대하지 않는다.
「베긴」은 그 안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협상 안의 내용이 명료하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일기·1978년3월22일)
그러나 이 같은 나의 노력도 별효과를 보지 못하고 이집트와 이스라엘사이의 협상은 지지부진하였다. 평화협상의 불 진전에 대한 국민들의 짜증은 곧 나에게 정치적 압력으로 나타났다. 나로서는 또 하나의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나는「사다트」와「베긴」을 불러 나와 더불어 집중적인 협상을 벌여 타협점을 찾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러한 결심을 장문의 친서에 담아「밴스」국무장관을 중동으로 보내「사다트」와「베긴」에게 전달했다.
두 사람은 모두 캠프데이비드의 초청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우리 세 사람은 이 계획을 8월8일 동시에 발표키로 했다.
당일 공식발표에 앞서 나는 의회 지도자들과 2명의 전 대통령, 그리고 몇 몇 언론계 지도급 인사들에게 미리 캠프데이비드 협상에 관해 브리핑을 하거나 사람을 보내 알려주었다.

<산장서 끝장보기로>
「베이커」와「잭슨」상원의원은 너무 조심스럽거나 지나치게 비판적이어서 브리핑대상에서 제외했다.
-나는「밴스」국무장관을 불러 세계지도자들에게 매시지를 보내 지원용 요청하도록 지시했다. 종교계 지도자들에게는 우리의 성공을 위한 l주일간의 특별기도를 부탁할 예정이다. 우리도 아무런 시간제약 없이 몇 날 며칠이고 캠프데이비드에 머무르면서 회담을 성공시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매스컴과의 접촉은 가능한 피할 예정이다. 우리는「사다트」와「베긴」에게 양보해야할 것은 하고 협상은 자유롭게 벌이자고 제의할 참이다.(일기1978년8월10일)
「밴스」국무장관과「브레진스키」보좌관에게는 서로 상의하지 말고 각자 독립적으로 이번 협상에 대한 브리핑노트를 작성해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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