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좌익 경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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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러한 네가지 점을 단서로 시경에서는 죽산의 집을 덮쳤고 정태영의 「강평서」를 압수했다.
▲죽산은 일제시 모스크바에서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소련공산당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상해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해왔다. 이러한 죽산의 활동을 역시 공산주의 운동을 하고있던 김×연이 시기해 일본경찰에 밀고하여 죽산은 체포되었다. 이점(밀고와 체포)은 취조과정등 여러 채널에서 확인한 사실이다. 어쨌든 죽산은 일경에 체포돼 활동을 중단했지만 소련공산당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죽산이 8·15후 공산당에서 이탈했다는 것도 당운영에서 박헌영과 의견층돌을 빚은 것이지 죽산이 극동코민테른에서 완전히 탈퇴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죽산도 취조중 인정한 것이다. 대구 10·1폭동사건(48년 대구지역 남로당이 일으킨 테러사건)의 주모자로 북한으로 도주했다. 뒤에 남으로 내려왔다가 체포된 간첩 윤장혁과의 대질심문에서도 죽산은 이 사건에 대해 이론적으로 승복했다.
윤은 김성곤씨(전 국회의윈으로 공화당재정위윈장을 지냄·작고)와 고교동참으로 정·재계침투를 노려 남파됐다가 체포된뒤 전향한 사람이다(윤씨는 전향후 경찰의 자문역으로서 당시 대공정보팀의 일을 돕고 있었음·작고).
▲경찰심문중 죽산은 정강정책은 이동화가 만들었다고 발뺌을 했고 이동화는 북한 노동당의 규약을 기초로해 정강정책을 작성했다고 실토했다. 하지만 이동화가 정강정책을 작성했다고 하여 당수로서의 책임이 면해질수는 없는것 아닌가. 또 죽산이나 이동화가 공산주의에서 전향한-확실히 사상적으로 전향한 것인지 모르지만 어떻든 그런 전력이 없었다면 혹시 우연의 일치라고 볼수도 있겠으나 그들의 과거경력에 비춰볼때 죽산의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었나 의심이 간다.
죽산은 이북에서 자금을 받았다는 것은 계속 함구했지만 민족에게 죄를 지었다고 자백했다.
▲경찰에서 심문이 끝난뒤 죽산에게 <노동자 농민을 내세우자 2백여만표를 받았고, 정권올 잡는 것이 눈앞에 보이자 다음 선거를 준비했으나 자금부족을 느껴 이북의 자금인줄 알면서도 쓰지않았느냐. 당선된 뒤에는 김일성을 무시하고 소련과 직접 담판하면 될것으로 생각한 아니냐>고 묻자 죽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동화 역시 김일성대학 정치학파 주임교수까지 지낸 공산주의자로 그도 자발적으로 전향했다기 보다는 6·25때 국군의 북진으로 생명을 보전키위해 어쩔수 없이 남으로 내려온 기회주의자다.
▲진보당원들은 대부분 좌익의 경력을 가졌었다.
그러면서 K씨는 『죽산이 간첩이라면 상당한 비중을 지닌 존재가 아니었느냐고 하겠지만 단지 북에서 이용한 뒤 버리는 존재지 큰비중을 둔것같지 않다』고 결론내렸다. 그의 이같은 결론은 <죽산이 만일 이북과 접선했다면 북으로선 가장 중요한 간첩인 셈인데 그 연락을 남의 정보원이기도한 이중첩자 양명산에게 시켰겠느냐>는 상식적인 세간의 질문에 대한 회답으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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