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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운영 칼럼

60년 만의 과거사 회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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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내가 지식인이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은 김수영의 자전적 평론 '詩여, 침을 뱉어라'를 통해서였다. 그는 지식인이라는 화두를 우리한테 쥐여주었고, 나는 시 평론 대신 지식인 평론을 배운 것이다.

"馬車馬야 뻥긋거리고 웃어라

별별 여자가 지나다닌다

화려한 여자가 나는 좋구나

내일 아침에는 부부가 되자

집은 산 너머가 좋지 않으냐

오는 밤마다 두 사람 같이

貴族처럼 이 거리 걸을 것이다

오오 거리는 모든 나의 설움이다"

-김수영, '詩여, 침을 뱉어라', 민음사, 1975, 59쪽.

남대문 시장 앞을 걷다가 이미지를 얻었다는 이 시 '거리'에 대해 김수영은 "나의 유일한 연애 시이며, 나의 마지막 낭만 시이며, 동시에 나의 실질적인 처녀작"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그의 연애에도, 낭만에도, 처녀작에도 관심이 없지만 사회주의 계열의 평론가 김기림은 우연히도 뒷날 이 시를 읽고 마지막 둘째 줄에서의 귀족(貴族)을 영웅(英雄)으로 고치면 어떠냐는 의견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것은 모독이었다. 앞으로 나의 운명이 바뀌어지면 바뀌어졌지 그 말은 고치기 싫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나의 체질과 고집이 내가 좌익이 되는 것을 방해했다. 그러고 보면 나의 시적 위치는 상당히 정통적이고 완고하기까지 하다. '거리'는 이러한 나의 장점과 단점이 정직하게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고…."(김수영, 1975, 60쪽) 4.19 공간의 삐딱한 청년 정운영도 이와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생활은 궁핍했지만 모두의 생각조차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시인은 사후에 더욱 오래 사는 사람"이라는 장 콕토의 절창에 격려되고, 사회는 거대한 생산력주의의 굉음에 이목을 집중하라는 약삭빠른 평론가들의 호소에 선동되고 있었다. 김수영과 박인환은 성향이나 기질에서 서로 가깝기 어려운 사람들이지만, 당시 사회의 이러한 스노비즘 경멸 풍조에서 다소 속내가 맞았던 게 아닐까?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강계순, '아! 朴寅煥', 문학예술사, 1983, 172쪽.

나는 목마와 숙녀의 댄디즘을 꿈꾼 적이 없다. 그럼에도 김수영과의 인연을 앞세우는 것은 혁명과 피의 냄새가 때때로 잠자는 코를 깨웠기 때문일까?

"오- 우리들의 8월로 돌아가자.

어찌 닭 울기 전 세 번뿐이랴.

다섯 번 일곱 번 그를 모른다 하던 욕된 그날이 아파

땅에 쓰러져 얼굴 부비며 끓는 눈물

눈뿌리 태우던 우리들의 8월-"

-송건호, '解放 前後事의 認識1', 편석촌, '우리들의 8월로 돌아가자', 한길사, 1995, 572~573쪽에서.

우리는 적당한 귀족 취미와 적당한 영웅 흉내로 이 세상을 본뜨면서 살아왔다. 이제 말의 수술이 필요하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뼈를 깎는 아픔이니, 십자가의 고통이니 하는 말만 없어도 좋겠다. 뼈니 십자가니의 고통은 귀족이냐 영웅이냐를 고르는 번뇌 따위와는 아예 비할 수조차 없는 진짜 아픔이다. 그래서 말인데 뼈를 깎는 아픔과 십자가의 고통을 한 조각이라도 '먼저' 보여주고 나서, 그래도 계속 그 아픔과 고통을 따르겠다는 '성자'가 있을 때만 그런 약속을 하게 하면 어떨까? '해방 공간' 60년 동안 귀족이니 영웅이니, 개혁이니 보수니 따위의 같은 말을 또 듣는다는 야유와 낭패감은 피하게 될 터이다. 근자에는 웬 국정원장 출신이 불법 감청에 연루됨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는 맹세를 거듭했다. 장차 "바람 앞으로의 맹세"가 줄을 설지 모르겠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