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돈·인재·여유를 벌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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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 출신 신입사원들이 회사 근처 바닷가에서 쉬며 손을 흔들고 있다.

휴대전화용 메모리 반도체 설계 회사인 EMLSI(Emerging Memory & Logic Solutions Inc.)에 다니는 황성보(32) 대리는 아침마다 제주도의 맑은 공기를 흠뻑 마시며 출근한다. 회사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회사까지는 걸어서 10~15분 정도. 해외 출장은 더 편해졌다. 매달 한 차례 이상 대만에 가는 황 대리는 비행기 출발 30분 전쯤 느긋하게 회사를 나선다. 공항이 차로 5분 거리인 데다 출국 수속도 인천보다 편하기 때문이다. 본사가 서울 가락동에 있을 때는 인천공항에 가기 위해 출발 서너 시간 전에 회사를 나와야 했다.

지난해 말 본사를 제주도로 옮긴 코스닥 기업 EMLSI는 제주도의 유일한 상장 회사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이 제주 이전을 진행 중이나 아직 본사 전체가 제주에 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영업을 하다 2000년 EMLSI를 창업한 박성식 사장은 "매출의 90% 이상이 해외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굳이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서울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고 이전 배경을 밝혔다.

서울에 있을 때 월 7000만원 넘게 들던 회사 임대료를 제주에선 그 절반 정도로 해결하고 있다. 통신수단이 발달해 국내.해외 커뮤니케이션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세(稅)테크를 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었다. 지방으로 이전한 수도권 기업은 법인세(순이익의 25%)가 5년간 면제된다. 지난해 이 회사의 순이익이 130억원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100억원 이상의 세금을 절약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EMLSI는 자체 공장이 없다. 반도체의 회로.공정 설계에서 제품 테스트까지 한 뒤 생산은 제조 전문 회사에 맡긴다. 몸통(공장)은 없고 머리만 있는 회사여서 '가볍게' 본사 이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직원 46명 중 34명이 반도체 제작의 머리 역할을 수행하는 엔지니어들이다.

국제자유도시를 꿈꾸고 있는 제주도도 첨단회사인 EMLSI를 유치한 덕을 보게 됐다. EMLSI는 제주에 이전하자마자 도내 대학 이공계 출신 5명을 새로 뽑았다. 최선호 IR팀장은 "우리 같은 회사가 없었다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제주도를 떠나야 했을지 모르는 인재들"이라고 했다.

물론 단점도 있다. 우선 친구.친지 만나기가 어렵게 된 게 문제다. 이 때문에 회사 측은 매월 4회까지 직원들의 서울 왕복 항공료를 전액 지원한다. 7명은 가족을 서울에 두고 혼자 내려와 있는데 대부분 자녀 교육 때문이다.

하지만 전반적인 반응은 좋다. 조금 일찍 퇴근하면 골프장 9홀을 돌 수 있어 직원 대부분이 골프를 즐기고 있다.

박 사장은 "가끔 밤낚시도 한다"며 "생선회를 일주일에 서너 번 먹다 보니 이젠 좋아하던 사람도 질린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유병덕 이사는 "가족과 함께 내려온 직원에게는 무이자로 전세자금을, 혼자 내려온 직원에게는 오피스텔 임대료를 지원한다"며 "비용이 줄어 그만큼 직원 복리후생을 더 해주고 신사업에 투자할 여력도 생겼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내년 9월 완공 예정으로 제주에 사옥도 짓고 있다.

제주=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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