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2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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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채현국은 물론 사주가 부친이었으나 박윤배의 변화를 친구에 대한 배신이라거나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 무렵에는 채와 박은 이념으로 서로 공존하고 있는 중이었다. '창작과 비평'이라는 잡지가 4.19 이후에 이러한 친구들의 발의로 시작되었고 특히 박윤배는 어렵던 시절에 언제나 백낙청의 충고자이자 후견인이었다. 그는 짧은 머리에 눈이 부리부리하고 어디로 보더라도 책 한 권을 읽지 않을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그는 처음에 나를 만나자마자 '객지'와 '한씨년대기'에 대한 자신의 독후감을 말했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강 이런 말이었을 것이다.

-객지는 해방 이후 노동하는 사람들을 소설의 전면에 내세운 점이 돋보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쟁의가 너무 앞서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오.

사실 나 자신도 그런 느낌을 갖고 있었다. 나중에 졸라의 '제르미날'을 영화로 보면서 박진감보다는 답답함을 느꼈다고나 할까. 그 뒤 80년대에 이른바 노동문제 소설들이 뒤를 잇게 되지만 대개가 교조적이거나 쟁의의 진행과 승리만 담고 있었다. 사실 돌이켜 보면 나는 당시 작가로서 자기 세계를 성장시키고 있었던 셈인데, 60년대의 함바 체험에다 전태일의 분신 사건을 엮어서 형상화했지만 나 스스로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의식보다 훨씬 뒤쳐져 있었다.

-글쟁이는 자기가 글의 대상으로 삼는 세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바꾸려는 행동도 동시에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서 쓰는 게 아주 중요하겠지요.

나는 그를 믿고 따랐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책을 읽으려고 애썼고 제한된 책의 범위를 넘어서기 위해 일본어를 다시 공부했다. 어느 때인가 그의 집에 우연히 갔다가 서가에 가득 찬 여러 분야의 책을 보고 나는 그가 누구보다도 먹물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는 백낙청 염무웅과 의논하여 나의 생계를 일 년여 동안 감당해 주었다. 박윤배는 그 뒤에 나 이외에도 이부영이나 김지하 또는 많은 후배를 만나고 도와 주었다. 그를 자주 만나던 무렵에 나는 결심하고 아내와 의논했다. 내가 노동현장을 찾아가 일하는 동안 스스로 생계를 꾸려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아내는 자기가 잘 알던 동네인 여대 앞에서 옷장사를 벌이기로 했고 우리는 여러 가구가 세들어 사는 신촌 영세민들의 동네에 방을 두 칸 얻어서 이사를 했다.

아내가 장사를 나가고 나 혼자 장남 호준이를 돌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김지하가 이문구 박태순과 함께 들이닥쳤다. 나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호준이를 안고 신촌시장 골목으로 나섰다. 어느 주점의 방안에 들어서니 허름한 차림의 잘생긴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손학규였다. 우리는 방안에서 기어다니며 혼자 노는 호준이를 옆에 두고 낮술을 마셨다.

-너 현장을 찾아가기로 했다며? 이 친구가 널 도울 수도 있을 거다.

김지하는 손학규를 내게 소개하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엔 속내를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 무렵에 나는 구로공단에 취업할 길을 찾고 있었다. 공단 본부 사무실 앞에 가면 취업공고장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 들어가 봤자 일이 제대로 걸릴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손발이 맞는 노동자 친구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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