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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케이블 타고 남북 첫 이산가족 화상상봉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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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60주년을 맞아 15일 남산 대한적십자사에서 최초로 열린 이산가족 화상상봉에서 북측의 딸들이 남측의 노모 김매녀(98)씨를 보고 오열하고 있다.

광복 60돌을 맞아 15일 처음으로 실시된 남북 이산가족 화상상봉을 통해 서울 남산동 대한적십자사 본사 등 전국 11개 상봉장과 북측의 평양 상봉장은 남과 북을 이은 광케이블을 타고 들어온 모니터 속의 혈육을 접한 이들로 눈물바다를 이뤘다.

◇ '54년만에 절한 아들'= 15일 오전 인천시 연수구 연수동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 화상상봉실을 찾은 변석현(96.인천시 중구 전동)할아버지는 54년만에 북의 두 아들 영철(61)씨와 영창(57)씨에게서 큰 절을 받았다. 1951년 1.4후퇴 당시 황해도 연백군에 부모님과 아내, 두 아들과 딸을 남긴 채 큰아들 영하(69)씨만 데리고 남으로 피난한 변 할아버지는 당연할 것같던 두 아들의 큰 절을 54년이 지난 다음에서야 받은 셈이다.

두 아들에게서 "부모님은 물론 아내와 딸이 이미 숨졌다"는 소식에 침통한 표정이던 변 할아버지는 이내 남측의 큰 손자와 북측의 작은 손자 이름이 '준식'으로 같다는 사실을 알고는 '참 묘한 우연'이라며 크게 웃기도 했다.

◇ "애비 노릇 못해 미안하다" = 15일 대한적십자사 부산지사에서 이산가족 화상상봉을 마친 원경섭(97.부산 부산진구 연지동) 할아버지는 "애비로서 자식들을 거두지 못한게 죄스럽다"면서 "북에 있는 아들과 딸을 직접 보고 죽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원 할아버지는 "북에 있는 자식들을 직접 만나 뭔가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 뿐"이라며 "직접 상봉하지 못해 안타깝지만 북에 있는 아들과 딸, 친척, 친지들의 생사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화상상봉이 시작되자 북측 아들딸이 가족사진 3장을 차례로 보여주며 이름을 얘기하자 원 할아버지는 가족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가며 생사를 확인했으며 원 할아버지가 "애비로서 도리를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자 북측 두 딸이 울음을 떠트렸고 남측과 북측 상봉장은 이내 울음바다로 변했다.

화상상봉이 시작된지 40여분 만에 북측 아들딸들이 "우리는 잘 살고 있으니 통일되면 다시 만나자"며 화상상봉장을 떠나자 원 할아버지는 못내 아쉬운 듯 "얼굴 본 것 만으로도 됐다. 다음엔 꼭 직접 만나자"며 쓸쓸히 상봉장을 떠났다.

◇ '제사까지 지내온 큰 형을 만나다'= 오전 10시부터는 김용권(69).세권(65)씨 형제가 한국전쟁 중에 헤어진 북한에 남겨진 큰형 흥권(76)씨를 만나고 있다.

3남1녀 가운데 장남인 흥권씨는 한국전쟁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세의 나이로 의용군에 끌려갔으나 다리가 불편해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강원도 원주까지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이후 가족들이 신문에 광고를 내는 등 흥권씨를 찾으려고 전국에 수소문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고 당연히 돌아가셨을 거라 생각해 30여년 전부터 명절에 제사를 지내오고 있었다.

둘째 용권씨는 "1945년 해방 당시 가족들이 한꺼번에 월남했었는데 큰형이 북한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거짓인 줄 알았다"며 "직접 만나서 밥도 먹고 그래야 하는데 화면으로만 보게 돼 답답하다"고 심정을 밝혔다.

허리 수술로 인한 아픈 몸을 이끌고 상봉장을 찾은 막내 세권씨도 "보름전 적십자사로부터 상봉 소식을 전해 듣고 형님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모처럼 만났지만….' = 1946년 4남매 중 큰 딸과 작은 딸을 북에 남겨둔 채 막내딸과 아들만 데리고 월남한 김매녀(98) 할머니는 끝내 어머니의 음성을 북측의 두 딸에게 들려주지 못했다. 김 할머니는 지난 해 찾아온 뇌졸중으로 제대로 모니터를 응시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북측의 딸들이 "어머니 말씀 좀 하라요, 눈 좀 떠보시라요, 말 한마디만 하라요.."라고 애타게 외치자 입을 떼려는 듯 입술을 계속 움직이고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못한 것이다.

서울 상봉장의 박여환(94) 할머니는 북쪽에 나온 세 딸의 얼굴을 즉시 알아보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서로 직접 어루만지거나 볼을 비벼볼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와 눈빛을 주고 받는 것만으로도 모녀간의 정은 넘쳐흘렀다.

"어머니 어머니 내가 원숙이야요. 어머니 내 말 들려" "그래 들려...".

최원숙(71)씨 등 북측의 세 딸은 '고향의 봄'을 불러 어머니의 가슴을 다시 한번 흔들었다. 1.4후퇴 때 박 할머니와 함께 남쪽에 온 원희(66)씨는 "언니들을 그리 애타게 찾았는데..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얼마나 우셨는지 모를거야"라며 모니터 안의 북쪽 언니들에게 손을 뻗었다.

디지털뉴스센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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