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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정책의 '골든 타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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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문정인
연세대 교수·외교정치학

11월 18일 제69차 유엔 총회 3위원회는 찬성 111, 반대 19, 기권 55라는 압도적 표 차로 대북 인권 결의를 채택했다. 이번 결의안은 북한 내에서 벌어지는 조직적이고 광범위하며 심각한 인권침해를 규탄하는 한편 그 책임자들을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하는 방안의 검토를 권고하고 있다. 전례 없이 강력한 이 대북 결의안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과하게 될지는 아직 불투명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번 결의안 채택을 환영하며 이를 하나의 외교적 쾌거로 여기고 있다.

 북한의 반발은 예상만큼이나 거세다. 11월 23일 북한 국방위원회는 “인권은 곧 자주권이고 해당 나라의 국권”이라며 이번 결의안을 “전면 거부, 전면 배격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무자비한 보복세례” 운운하며 “이 땅에 핵전쟁이 터지는 경우 과연 청와대가 안전하리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특히 미국인 억류자들에게 “인도적인 관용”을 베풀어 석방해 주었는데도 미국이 “대조선 인권소동에 광분”하고 있다는 게 북측의 가장 큰 불만이다. 11월 2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유엔의 북한 인권 결의안 채택을 비난하는 대규모 군중대회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북한 전역에서 반미 군중대회를 전개하고 있다.

 우리 정부의 입장은 분명해 보인다. 그간 북한의 핵·경제 병진노선을 강력히 비판하면서도 남북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듯, 인권 문제에도 같은 논리를 적용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보편적 가치의 시각에서 북한 인권에 대한 압박을 강도 높게 가하는, 다른 한편으론 고위급 회담의 재개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북한이 이러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조건 없이 수용해 대화에 나선다면 이는 말 그대로 박근혜 정부의 ‘원칙 외교’가 일군 대박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지금까지 북한이 우리 정부에 일관되게 요구해 온 것은 ‘상호 비방 중지’다. 특히 ‘최고 존엄’에 대한 비방이나 모독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삐라 살포를 이유로 2차 고위급 회담을 거부하며 내건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만일 우리 정부가 북한 인권법 제정이나 유엔 북한 인권조사 현장사무소 한국 설치 같은 구체적인 행보에 나서게 되면 북의 반발은 걷잡을 수 없게 증폭될 공산이 크다. 기본적으로 북한 지도부는 우리 정부가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빌미 삼아 김정은 체제를 뒤흔듦으로써 ‘제도, 체제, 흡수 통일’을 가속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내년 상반기 한반도 상황이 걱정되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3월이면 예년과 다름없이 한·미연합훈련 키 리졸브 연습과 독수리 훈련이 열린다. 북한도 이에 맞서서 공세적 군사훈련과 미사일 시험발사에 나서리라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다. 물론 4차 핵실험 가능성도 열려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전쟁 중에도 대화는 해야 한다”는 말을 남긴 바 있지만, 그처럼 고조된 위기 국면에서는 현실적으로 남북대화가 불가능할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5월 미 의회 연설에서 “케이크를 먹으면서 동시에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You cannot have the cake and eat it)”는 촌철살인으로 북한의 ‘핵과 경제 병진’을 비판해 큰 공감을 얻은 바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제 평양은 ‘남측이 인권 문제를 거론하며 우리와 대화를 할 수는 없다’는 말로 이를 되갚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예방적 조치다. 먼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북한 주민들의 인권 개선이지 체제전복이나 흡수통일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명시적으로 보내고,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하다면 고위급 특사의 파견도 고려해야 한다. 금강산 관광 재개와 5·24 조치 해제, 인도적 지원과 교류협력의 구체적 이행이라는 선제적 유인책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토대 위에서 쉽게 이산가족 상봉이나 DMZ 세계평화공원 조성 같은 소프트한 이슈를 풀어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작은 시작이 결국은 군사훈련이나 정치 현안 같은 민감한 이슈를 여는 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관성을 넘어선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대목이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떤 식으로든 결실을 맺으려면 앞으로 두세 달이 ‘골든 타임’이 될 것이다. 이 시기를 놓치면 집권 3년 차의 ‘레임덕 징크스’에 갇힌 남북관계는 반전의 돌파구를 찾기 어려워진다. 박 대통령이 명분과 실리를 모두 놓치지 않는 ‘유산의 정치’를 남기고자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격과 틀을 깰 적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통일을 준비하는 길이기도 하다.

문 정 인 연세대 교수·외교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