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명작 속 사회학 <47>『박씨전』 - 1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박신영 역사에세이 작가

1636년 12월 9일(음력), 청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다. 한 달 남짓한 항전 끝에 인조는 이듬해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른다. 이 전쟁, 병자호란서 상처입은 민족적 자존심의 회복을 꾀한 소설이 ‘박씨전’이다.

한양 양반 이득춘은 아들 시백을 금강산에 사는 박처사의 딸과 혼인시키기로 약속한다. 박처사의 능력을 믿기에 며느릿감 선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박처사의 딸은 재주는 뛰어나지만 너무나도 못생긴 처녀였다. 혼인 후 시백과 시어머니는 신부 박씨를 구박한다. 박씨는 홀로 후원에 있는 별당에서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일으키고 남편 시백의 장원급제를 돕는다. 3년이 지나 박씨가 허물을 벗고 미인으로 변신하자 시댁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가족으로 인정한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전반부다.

후반부는 병자호란이 배경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박씨는 청나라 왕이 조선의 인재를 해치려 하는 의도를 알고 이시백과 임경업을 보호한다. 남편 시백을 통해 조정에 전쟁 대비를 건의하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전쟁이 시작되고 두 달도 안 되어 항복하게 된다. 한편 박씨는 적장 용홀대의 복수를 하러 온 용골대를 매섭게 야단친다. 이후 왕은 박씨를 충렬부인으로 봉했다.

일러스트=홍주연

무시당하던 어린 여자, 조선의 약자가 국왕도 중신들도 못해낸 큰일을 해내다니! 당시 이 소설을 즐기던 사람들은 박씨부인의 활약을 통해 통쾌함과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 이상하다. 이 소설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전반부의 가정 이야기와 후반부의 전쟁 이야기가 함께 들어 있다. 두 이야기는 왜 얽혔으며, 어떤 주제의식으로 연결된 것일까? 일단 여자는 예뻐야 나라를 위한 활약도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소설을 어린이용 동화로 처음 읽었다. 그때는 박씨부인의 진가를 몰라보는 남편 이시백이 참 한심해 보였다. 미인으로 변신한 후에야 박씨에게 잘 해주다니? 한심한 놈! 어른이 되어 원전으로 다시 보니, 바로 그 점에 『박씨전』의 숨은 의도가 있는 것 같다. 박씨의 진가를 모르는 한심한 남편, 그는 바로 왕이다. 이 소설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대응을 이루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 후반부의 찌질남은 왕이다. 전쟁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인재들을 제대로 알아보고 활용하지 못하는 한심한 왕, 인조다.

하지만 민중들이 이 소설을 즐길 당시는 왕조 시대다. 함부로 왕을 욕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가부장제가 굳건한 유교 사회였기에 시아버지 이득춘이나 남편 이시백도 그리 부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소설에서 대놓고 어리석게 그려지는 인물은 만만한 여성인 시어머니뿐이다. 그래도 이 소설을 한글 필사본으로 돌려 읽던 당시 여성들은 알았을 것이다. 조선을 지배하던 남성, 양반, 왕이란 존재가 사실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미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남자나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왕이나 다 그 놈이 그 놈이라는 것을. 남편이건 왕이건, 윗사람을 잘못 만나면 아랫사람들만 고생한다는 것을.

이렇게 알고 보면 『박씨전』은 매우 급진적인 소설이었다. 겨우 여자는 무조건 예뻐야 한다, 병자호란은 우리가 이길 수도 있었다, 정도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 소설은 말한다. 문제의 근원이 되는 인물을 제대로 파악하고 비판하라고 말이다.

『백마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저자, 역사에세이 작가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