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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아들 「8문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뒷날 이공린은 박씨부인과 사이에 아들 여덞을 두었다.
l오 (오) 2구 (구) 3원 (원) 4타 (타) 5별 (별) 6벽(벽) 7경(경) 8곤(곤)이라고 거북구(구) 아니면 고기어(어)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모두가 문장에 뛰어나「8문장」으로 꼽혔다.
그런데 세째 구이 갑자사화에 연루, 죽음으로서 첫날밤 자라 한마리가 죽은것과 맞아떨어졌다는 이야기다.
임신왜란에 유성룡을 도와 병참책임을 맡는등 큰 활약을 했던 이시발등 후손들이 현달했다.
17대가 지난 지금까지 후손들은 자라를 먹지 않는 것을 가법으로 지켜온다.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은 상서공파의 후예. 임진왜란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국난을 수습했고 전후 정승에 올라 고개를 들기 시작한 당쟁을 조정하는데 진력한 그는 조선조「4대 명재상」의 한사람. 광해군때 폐모논에 극력반대하다 북청에 유배돼 죽었는데 기지와 유머가 풍부한 만큼이나 성품이 곧고 맑아 청백리에도 올랐다.
영조때 좌의정 이태좌, 소론4대신의 한사람인 이광좌, 순조때 영의정 이경일 등이 모두 백사의 후손.
국당공파에서는 병자호란뒤 효종·송시열과 함께 북벌을 계획했던 이완대장이 가장 걸출하다.
『군산을 삭평턴들 동정호 넓을랏다…』하는 시조 한수가「뜻 두고 못이룬」한으르 후세에까지 공감을 전한다. 벼슬은 좌의정까지 올랐다. 군인으로 재상에 오른 사람은 조선조를 통틀어 7명뿐.
경주이씨는 조선조에 8명의 정승, 3명의 대제학, 1백78명의 문과급제자를 냈다.
근세의 경주이씨 인물로는 헤이그밀사사건의 이상설과 독립운동가이자 해방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이 있다. 이시영은 백사의 11세손이며 한말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 28세에 평안도 관찰사를 지낸 그는 일제에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간부양성에 힘썼고, 3·l운동후 임정이 수립되자 법무·재무총장에 추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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