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513》(제78화) YWCA(6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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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연합회 회관을 지을 당시만 해도 그렇게 높고 큰 건물이 많지 않아 대여하는 것이 쉬웠다. 마침 포항제철이 4백평정도의 사무실이 필요했다. 비교적 중은 조건으로 집이 다되기 전에 보증금을 받아 건축비에 충당했다. 우리로서는 두층을 다 단일회사가 사용하는 것은 건물관리에도 그렇고 여러가지 편리한 점이 많아 그이상 더 좋은 상대가 없었다.
그러나 포항제철은 1년도 못되어 회사 자체가 팽창하는 바람에 사무실이 더 필요하게 되었고 이 건물은 애초에 10층 건물로 설계되었던 것으로 이 기회에 몇층 더 올리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보았다. 뜯고 보니 도저히 74층이상은 안되겠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부실건물이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어려운 고비를 겪으며 2층을 더지어 포항제철에 임대했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되었다.
71년쯤 해서 여기 저기 호화판의 고층빌딩이 늘어나고 있었다. 포항제철이 그해 완공될 쌍용빌딩으로 갈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렇게 되면 한국YWCA는 그 보증금을 다 물어주어야 하는데 어디서 그 돈이 나올것인가 난감했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붙잡아야만 했다.
정면으로, 측면으로 많은 운동을 하여 회사자체가 울산에 자체건물을 계획하고 있으니 2, 3년동안 그 건물이 될때까지는 그대로 있기로 약속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부터 보증금에 해당한 액수의 돈을 적립하기로 하고 될수 있는대로 절약운동을 펴기로 했다.
그 해는 가나에서 세계대회가 있을 예정이었다. 언제나 대회가 있을 때면 세계YWCA 실행위원을 추천하라는 편지가 온다.
이번에는 김현자씨가 세계Y에 진출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후보로 추천하기로 했다.
그때의 세계대회에 한국대표로는 70년에 있었던 한국Y 전국대회에서 김현자씨 그리고 필자가 선출됐다.
김애진회장 박순양총무, 학생대표배서옥양등 모두 5명이 정식대표로 참가했다.
그러나 재정이 어려운 연합회 형편으로는 네사람 (학생대표는 세계 Y부담이었다) 의 의회참석을 다 부담하는것이 옳지않다고 생각한 회장과 필자는 참석할것을 포기했다.
김현자씨는 실행위원 후보로 추전했으니 가야했고 사무장 총무까지는 빠질 수가 없으니 가기로 했다. 그러면 김현자씨의 표수가 두표나 감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그런데 같은 해에 이태영씨가 여변호사회의로 유럽에 가게 되었고 서울Y회장 최이권씨도 다른 어느 회합에 참석차 유럽에 가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최이권씨는 회장대리로, 이태영씨는 필자 대리로 참석하기를 세계Y에 교섭한 결과 그것이 이루어져5명의 정식대표가 차질없이 참석하게 된것이다.
나는 물론 못가게 된것이 섭섭했지만 이태영씨가 나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었다. 실행위원선거에 있어서 나보다는 이박사가 훨씬 더 활발하게 운동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태영박사는 대회기간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을 기억하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일본이 그동안 차지했던 아시아지역을 대표하는 자리를 한국이 얻게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계Y의 정책기구인 실행위원회의 일원으로 김현대자씨가 그 첫 발걸움을 내디딘 것이다. 다음 세계대회가 있던 75년 뱅쿠버에서의 선거에서도 김현자씨가 다시 출마하여 재선되었다.
다시 회관 대여문제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박정양총무가 격무에 지치고 회관문제로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에 결국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진단은 신장염이었다. 수술까지 하게 되었는데 마취가 풀릴때 『안돼, 도장찍어주면 안돼요』 하는 말을 안타깝 되풀이했다. 그건 포항제철이 해약을 하고 나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었고 해약서에 사인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었다.
포항제철도 YWCA의 사정을 충분히 참작하여 자체의 사무실을 건물이 될 때까지 점차적으로 철거를 하는 방법으로 다소의 편의를 보아주었고 연합회도 새로 임대하는 상대를 열심히 찾아 차질없이 순조롭게 진행시켰다. 그런 고난을 치른 연합회는 10년 이내에 보증금 전액을 저축했으며 앞으르도 사업기금을 위해 근검절약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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