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준봉 기자의 '이 책은 왜?'] 회피하지 않고 최대치의 슬픔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해바라기 연가
- 이해인

내 생애가 한번 뿐이듯
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

나의 임금이여
폭포처럼 쏟아져 오는 그리움에
목메어
죽을 것만 같은 열병을 앓았습니다

당신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내 불치의 병은
사랑

이 가슴 안에서
올올이 뽑은 고운 실로
당신의 비단 옷을 짜겠습니다

빛나는 얼굴 눈부시어
고개 숙이면
속으로 타서 익는 까만 꽃씨
당신께 바치는 나의 언어들

이미 하나인 우리가
더욱 하나가 될 날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의 임금이여
드릴 것은 상처뿐이어도
어둠에 숨지지 않고
섬겨 살기 원이옵니다

올해 한국 나이로 일흔인 이해인 수녀가 1976년에 낸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가톨릭출판사)에 실린 ‘해바라기 연가’의 전문이다. ‘시(詩)의 시대’라고 호명할 정도로 서정시가 뜨겁게 읽히던 1980년대, 수녀는 그 중심에 있었다. 79년 두 번째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 83년 세 번째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이상 분도출판사)가 잇따라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르며 합쳐서 수 십 만부가 팔리자 당시 문단은 당황했다. ‘이해인 현상’의 원인에 대한 그럴 듯한 보고서를 제출하느라 바빴다.

박두진 시인은 『민들레의 영토』에 대해 “시인이 되기 위한 시로서가 아니고, 시인으로서의 시가 아닌 데에 그의 시의 일단의 순수성과 그 동기의 초월성이 있다”고 했다. “혼자 보기 아깝다”며 우연히 접한 『민들레의 영토』에 실린 시편들의 출간을 주선했던 홍윤숙 시인은 『내 혼에 불을 놓아』에 대해 “대패질도 기름칠도 하지 않은 마구 깎아 낸 원목 같은 생명감이 있다”고 평했다.

평론가 구중서씨의 평이 재미 있다. 한 잡지 기고글에서 그는 “수녀의 시가 한국 시문학계에서 반드시 높은 수준으로 등급 매겨져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며 그 이유로 시어가 대부분 너무 단순 소박하다는 점을 꼽았다.

구씨는 그러면서도 수녀의 시가 절대자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표현한 종교시이되, 관념적이지 않고 사뭇 인간적이어서 뜨거운 사랑을 받는다고 분석했다. 하느님의 형상 대로 창조된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정열·욕구·번민 등 모든 인간적 갈망은 말하자면 그 사랑을 위한 땔감이다. 수녀의 시는 절대자에 대한 사랑의 땔감을 자처한 자의 고결한 순명(順命)을 여과 없이 보여줘 아름답다는 얘기였다.

알려진 대로 수녀는 2008년 육신의 병을 얻었다. 죽음의 공포,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은 수녀에게도 감당키 어려운 것이었을 테지만 그는 예상 밖으로 꿋꿋하고 덤덤했다. 오히려 투병의 괴로움을 땔감 삼아 시를 썼다고 할까.

2010년 신작 시집 『희망은 깨어 있네』를 펴낸 데 이어 이번 주 새 시집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이상 마음산책)을 냈다. 두 번째 ‘투병 시집’이자, 64년 수녀가 속한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한 지 만 50년이 되는 해에 나온 시집이기도 하다.

시집에는 신작 시 100편, 짧은 일기글 100꼭지가 실려 있다.

시편들은 대체로 의연하고 때때로 명랑해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역시 ‘영성의 갑옷’을 뚫고 불쑥불쑥 인간적인 아픔과 눈물을 내비치는 장면들이 마음을 건드린다. 가령 ‘산에 당신을 묻고’에서는 수녀는 ‘깊은 산에/당신의/살과 뼈를 묻고//산보다 큰 슬픔 하난/가슴에 품고’ 내려오는 길, ‘소리쳐 울면/이 슬픔도/가벼워질 것 같아서//나는 이제 울지도 못하네’라고 쓴다. 누구의 죽음이었을까. 어머니였을까. 수녀는 회피하지 않고 최대치의 슬픔을 고스란히 맞겠다고 한다. 죽음과 싸우는 자신의 처지보다 가까이 지내던 이들의 죽음에 더 가슴이 미어진다.

시편에 비해 일기글은 보다 적나라하게 내면을 드러낸다. 2011년 2월 1일 일기, 수녀는 ‘오늘은 하늘이 어찌나 맑고 밝고 푸르게 투명한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아름다움의 극치’는 사람을 울게 만드는가’라고 쓴다.

불과 얼마 전인 올해 10월 26일 일기에서는 ‘가을이 하는 말을 나는 다 알아들을 수 있을까. 저 푸른 하늘이 나에게 하는 말을 나는 생전에 다 들을 수 있는 것일까. 이 가을은 나에게 너무도 맑고, 깊고, 높고, 넓다’고 했다. 시보다 더 시 같은 울림을 전하는 산문글이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