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베이루트에 두고 간다”|희로 떠난 아라파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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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나는 간다. 그러나 내 마음은 영원히 베이루트에 남으리라.』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야세르·아라파트」PLO 의장은 솟구쳐 오르는 슬픔을 감추면서 30일 서 베이루트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결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지난 12년 동안 대 이스라엘 투쟁의 본거지였던 레바논을 떠나면서 회한이야 어찌 없겠느냐마는 팔레스타인 국가독립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서는 슬퍼할 여유가 없음이 뚜렷이 나타났다.
「아라파트」의장은 이날 상오 9시 프랑스군의 선도아래 중무장한 경호원들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면서 흑색 메르세데스 승용차 편으로 베이루트 항에 도착, 9발의 예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PLO 전투요원들을 레바논 땅에서는 마지막으로 사열했다.
이보다 앞서 평화유지군으로 와있는 미 해병대는「아라파트」 의장이 항구로 가는 연도의 옥상에서, 그리고 프랑스 평화유지군은 대전차 무기와 저격용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채 건물 속에 숨어 저격병을 각각 감시했다.
이날「아라파트」의장을 태우고 간 아틀란티스 호는「아라파트」의장이「와잔」레바논수상과 회담하는 동안 지중해 주둔 미 6함대 소속 프리기트 함 1척의 안내를 받으며 베이루트 항구에 입항.
「아라파트」의장이 사열을 마치고 대기하고 있던 그리스 선박 아틀란티스 호에 승선할 때 그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한 그의 동료들은『승리할 때까지 투쟁하자』고 절규했다.
「아라파트」의장은 그리스로 떠나기 앞서「와잔」수상 등 레바논 정부지도자 및 좌파 지도자들의 배웅을 받는 자리에서 베이루트 시민들에게 고별사를 발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이라는 팔레스타인 인들의 꿈을 향한 대장정을 계속하겠다.』고 다짐하고 『베이루트 시야 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상징적 도시가 됐다』고 찬양하면서 『우리들은 자손만대까지 지하드(성전)를 치를 운명에 놓여있다』고 강조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앞으로 다마스커스를 주요 본거지로 삼아 활동하겠지만 베이루트에서와 같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아랍 국의 수도를 찾아 나설 것이라고 PLO의 제2인 자인「아부·이야드」가 30일 말했다.「살라·할라프」라는 본명보다는「아부·이야드」로 더 널리 알려진 그는 아직도 베이루트에 잔류,「아라파트」PLO 의장이 떠난 지 수 시간 후 폐허의 베이루트 남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이 밝혔다.
일반적으로 옛날부터의 동료인「아라파트」보다 강경 노선을 취하고 있는 전직교사「아부·이야드」는 이 기자회견에서 이스라엘의 맹공으로 인한 PLO의 곤경을 본체만체했던 아랍 국가들을 맹렬히 통박했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지금까지의 투쟁 중 가장 큰 시련이었던 지난 6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견뎌내고 대부분의 여타 PLO 지도자들 및 수 천명의 전사들과 함께 살아남은「아라파트」의장은 이날 새 본거지에서 대 이스라엘 항쟁을 계속하겠다고 다짐 했다.
지난 60년대 중반 이스라엘과의 투쟁을 위해 게릴라들을 지휘하던 이래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 카키 복에 팔레스타인식 두건, 그리고 뒤 허리에 찬 권총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아라파트」의장은 인간적 용기가 어느 정도 갈 수 있는가를 증명해낸 사람이다.
고전적 혁명지도자로서의 생활을 계속해온 그는 아랍세계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유지해온 서방세계로부터도 점점 더 많은 인정을 얻어내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아라파트」의장은 l929년 예루살렘에서 출생, 10세 때 이미 유대인 게릴라 조직과의 항쟁에 가담했던 전형적인 투사.
『나는 팔레스타인 해방과 결혼했다』는 53세의 노총각「아라파트」의장은 지난 56년 수에즈운하 분쟁 때에는 이집트에 가담해 이스라엘·영국·프랑스에 대항해 싸우기도 했다.
그 후 쿠웨이트로 가 알파타 게릴라 조직을 창설했으며, 69년에는 PLO 의장직에 올라 팔레스타인 민족의 지로자가 되었다.

<외신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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