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서] 러시아는 자국민 챙기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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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유철종 특파원

러시아 외교관 자녀들이 폴란드 극우파 청년(스킨헤드)들에게 폭행당한 사건으로 모스크바가 들끓고 있다. 지난달 31일 폴란드 바르샤바에 주재하는 외교관 자녀 3명이 귀갓길에 괴청년 10여 명에게 집단구타를 당했다. 청년들은 16~17세 청소년인 외교관 자녀들을 둘러싸고 반(反) 러시아 구호를 외치며 발길질을 해댔다. 외교관 자녀들의 이빨이 빠지고 코뼈가 부러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격분했다. 그는"비우호적 범죄 행위"라며 외교부에 강경 대응을 지시했다. 외교부는 폴란드 대사를 불러 항의했다. 폴란드 주재 러시아 대사를 소환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현지 러시아 대사관은 '조속한 범인 색출과 유사 사고 방지 대책'을 촉구하는 항의 편지를 폴란드 외교부에 보냈다.

러시아 정부의 대응은 외교 관례상 이례적이라 할 정도로 강경하다. 자국 내에서 일어나는 외국인 폭력사건을 대하는 러시아 당국의 태도와 비교하면 더 그렇다.

러시아 대도시에서 스킨헤드의 외국인 폭행.강도.살인은 끊이지 않고 있다. 아프리카.아시아 출신 유색인종이 주된 공격 대상이다. 인권단체들에 따르면 올 상반기 중 외국인 8명이 사망하고 115명이 중상을 입었다. 지난 한 해 10명 사망, 75명 중상에서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인 역시 공격 대상이다. 지난 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국인 유학생이 스킨헤드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아직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러시아 내 스킨헤드는 5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유럽보다 심각하다. 그러나 러시아 경찰은 "단순 폭행사건이다. 인종주의와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제대로 된 수사와 처벌을 기대하기 힘들다.

모스크바의 한국인이 러시아 정부의 보호를 충분히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러시아의 한국 교민들은 우리 정부의 관심과 보호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자국민 폭행에 대한 러시아의 과잉 반응은 오히려 우리 정부가 배워야 할 대목인 듯하다.

유철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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