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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게 진화하는 도·감청 기술]미국산 레이저 장비 2000만원이면 구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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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옛 안기부 불법 도청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지만 전문가들은 "8년 전에 일어난 그 사건은 도청 기술 측면에서 볼 때에는 초보 중의 초보"라고 지적한다. 도.감청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달해 이젠 훨씬 쉽고 빠르게 도청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감청은 엿듣는 내용에 따라 ▶직접 만나 하는 대화 ▶일반전화로 하는 통화 ▶휴대전화 통화 ▶e-메일.인터넷 등으로 나뉜다. 이른바 '4대 도.감청'이다. 이 가운데 그동안 안전한 것으로 알려진 휴대전화 통화도 도청이 가능한 장비가 잇따라 개발되고 있음이 확인됐다. 또 e-메일.인터넷 등은 별다른 장비 없이 손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사실상 '도.감청 안전지대'는 사라진 실정이다. 이 때문에 사생활이 침해되고, 산업 기밀이 유출되며, 국가 정보까지 도둑질당하지만 이를 방지하는 기술이나 법규는 여전히 허술하다.

◆ 첨단화하는 도청 기술=4대 도.감청 가운데 옛 안기부 불법 도청 사건에서 나오는 원격 대화 도청은 가장 전통적인 방식이다. 이런 도청도 1990년대까지는 사무실.집이나 식당에 도청장치를 숨긴 뒤 대화 내용을 외부에서 무선으로 듣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요즘엔 150m 밖에서 사무실 유리창에 레이저를 쏜 뒤 미세한 떨림을 감지해 엿듣는 기술까지 개발됐다. 한 보안업체 관계자는 "국내에선 미국산 레이저 도청기가 2000만원선에 거래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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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전화 도청은 도청기를 전화기 안에 꽂거나 전신주.전화국 등의 전화 단자함에 연결한 뒤 외부에서 유.무선으로 대화 내용을 녹취하는 방식이다. 2000년 이후엔 외부에 노출된 전화 송수신 선에서 나오는 미약한 전기 신호를 크게 확대(증폭)해 음성 데이터를 엿듣는 첨단 기술이 나왔다. 보안업체인 금성시큐리티 남형종 이사는 "이스라엘산 '옥터퍼스'는 120회선 이상의 유선전화를 도청할 수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국내에서만 가입자가 3800만 명에 달하는 휴대전화 도청 가능성이다. 지금까지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미국.러시아 등에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휴대전화조차 도청이 가능한 장비가 속속 개발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브루스 슈나이어 카운터페인사 최고 기술책임자는 "아날로그 휴대전화기가 나왔을 때도 제조사들은 처음에 '도청이 불가능하다'고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도청이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CDMA는 무선 전파를 이용한 이동통신이다. 하지만 통화가 전파로만 주고받는 게 아니라 중간에 유선전화망을 통과한다. 이 과정에서 암호만 풀면 도청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최근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새롭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사이버 도.감시다. 기업들은 물론 수사기관들도 이에 대한 관심이 많다. 국가 안전 보장과 범죄 예방 및 수사 등을 위해 전화를 감청하는 것처럼 인터넷도 감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검찰이 올 초 도입을 검토했던 '인터넷 추적시스템'은 이 프로젝트가 만약 완성된다면 인터넷 업체나 통신 회사의 도움 없이도 각종 인터넷 사이트의 사용자 정보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이 프로젝트 입찰에 응했던 보안업체 관계자는 "다른 수사기관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 불법 유통되는 도청 장비=우리나라에선 도청 자체가 불법이라 도청 장비도 수입.유통.판매가 금지돼 있다. 결국 요즘 쓰이는 도청 장비들은 몰래 국내로 들여온 것이다. 정통부 이정구 과장은 "보따리상 등을 통해 도.감청 장비가 반입돼 단속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원격 전자도청기는 보따리상이 주로 일본에서 몰래 갖고 와 전자상가 등에 공급한다. 도청 기술이 발달한 미국이나 러시아의 제품은 성능은 좋지만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다. 미제 첨단 도청 장비들은 중소 무역상을 통해 들여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소무역상 출신의 한 기업인은 "지방에서 오퍼상을 하던 친구가 몇 년 전 모 기관의 부탁을 받아 해외 보안장비전시회에서 도청 장비를 대신 구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밀수된 도청기들은 기업.심부름센터 등으로 흘러가 불법 및 사설 도청에 악용된다. 심부름센터에서 돈을 받고 도청으로 배우자의 부정이나 경쟁자의 비리 사실 등을 캐내거나, 기업들이 경쟁 업체의 기술을 몰래 엿보는 데 쓰인다. 최근 중국 업체들이 국내 기업을 도청하는 사례가 늘면서 국정원이 이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킬 정도로 글로벌 도청까지 벌어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도청 방지.탐지 업체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서울의 도청기 탐지업체인 Z사 관계자는 "상반기만 해도 1주일에 3~4건이던 탐지 의뢰가 최근엔 하루 2~3건으로 늘었다"고 말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중요한 회의를 하려면 먼저 도청 탐지를 하는 게 일반화됐다"고 전했다. 일부 대기업은 아예 정기적으로 도청 탐지를 의뢰하거나 자체 보안 규정에 탐지조항을 넣는다.

이철재.장정훈.이원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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