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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 시간탐험대 2기 - ② 정릉 답사로 본 태조와 신덕왕후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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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흔적을 따라가는 시간탐험대의 여행. 지난 경복궁 답사에 이어 살펴볼 장소는 서울 성북구 정릉(사적 제208호)입니다. 태조의 두 번째 비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죠. 신덕왕후에 대한 태조의 사랑은 각별했다고 전해집니다. 탄탄한 친정의 후원을 기반으로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요, 왕자의 난과 함흥차사 등 조선 건국 초기 비극과 연결되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지난 15일 문화유산국민신탁 권준흥 연구원의 안내로 시간탐험대가 정릉 탐험에 나섰습니다.

정리=이지은 기자 사진=우상조 인턴기자 도움말=문화유산국민신탁, 『포토에세이 정릉』

정자각의 정면 모습. 뒤편으로 신덕왕후의 능침 공간이 보인다.

버들잎 설화와 태조 이성계

어느날, 한 젊은이가 사냥을 하다 목이 타 우물가로 달려가 물 긷던 여인에게 물 한 그릇을 청했다. 급히 물을 들이키려는데, 버들잎 하나가 떠 있어 물을 마시기가 까다로웠다. 젊은이가 여인에게 버들잎을 띄운 까닭을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급히 드시다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하였습니다.”

여인의 마음씨에 탄복하며 고개를 들어 살피니 참으로 곱기도 하였다. 미색에 갸륵한 마음까지 갖춘 여인은 당대 권문세가로 높은 벼슬을 지낸 곡산(谷山) 강(康)씨 윤성(允成)의 딸이었다. 우물가에서 물을 청한 젊은이는 무예라면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재주와 기백을 자랑하던 이성계였다. 유명한 ‘버들잎’ 설화의 주인공이 바로 태조와 신덕왕후다.

이성계는 이미 함경도 세력가의 딸인 한씨(신의왕후)와 결혼한 처지였다. 하지만 고려시대엔 향리에는 향처(鄕妻), 개경에는 경처(京妻)를 두는 풍습이 있었기에 강씨를 경처로 맞아 정식으로 혼인했다.

1 능침 공간의 혼유석 앞에서 권준흥 연구원의 설명을 듣고 있는 시간탐험대 대원들. 2 문인의 공간인 중계에서 대원들이 포즈를 취했다.

권문세가의 딸 신덕왕후

개경에 든든한 기반을 둔 강씨와 그녀의 친정 덕분에 이성계는 중앙의 정치인들과 교분을 쌓아가며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위화도회군 때나 정몽주를 살해한 뒤 대응 과정에서도 강씨의 큰 도움을 받았다. 건국 직전인 1391년 향처 한씨는 세상을 떠나고, 이성계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경처 강씨는 1392년 건국과 함께 당당히 조선 왕조의 첫 왕비이자 국모의 자리에 올랐다. 이에 신덕왕후 강씨의 영향력은 급기야 태조 이성계와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방우·방과(훗날 정종)·방의·방간·방원(훗날 태종)·방연(일찍 죽음) 6형제를 모두 물리치고, 자신의 아들인 방번과 방석 중 차남인 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데까지 이르렀다.

권준흥 연구원은 “야사에 따르면 신의왕후 소생의 장남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건의를 들은 신덕왕후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했고, 울음소리를 들은 태조가 마음을 바꿔 신덕왕후 소생의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신덕왕후에 대한 태조의 총애가 극진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신덕왕후의 자식들을 모두 죽음으로 내몬 왕자의 난의 계기가 된다.

정릉이 정릉동으로 온 까닭은

“정릉은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을까요?” 권 연구원의 질문에 시간탐험대 대원들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 위치는 정동입니다” 손세민(서울 신도초 4) 대원이 정답을 맞췄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박서현(인천 신정초 5) 대원이 답했다. “원래 서울 정동에 있었는데, 태종이 이곳으로 무덤을 옮겼어요.”

자식들에게 다가올 참극을 알지 못한 채 신덕왕후 강씨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태조가 즉위한 지 5년 뒤, 왕후로 책봉된지 4년 1개월 만이었다. 신덕왕후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태조는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능지를 정하는 일에 직접 나섰다. 처음에는 지금의 고려대가 있는 안암 지역을 택했으나, 땅을 파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물이 솟는 바람에 도성 안인 정동에 능지를 마련했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봉분 옆에 자신의 봉분까지 마련해 놓고 능호를 ‘정릉(貞陵)’이라 했다. 공신으로 하여금 3년간 능을 지키게 했으며, 정릉 동편에 흥천사라는 절을 지어 그의 명복을 빌었다. 태조는 궁궐에 있으면서도 흥천사에서 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비는 불경소리와 종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3 홍살문을 지나 뻗어 있는 신도. 왼쪽 길은 참도, 오른쪽 길은 어도다. 4 정릉의 혼유석

정릉에 분풀이한 태종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 끝에 조선 3대 왕이 된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와의 사이에 생긴 갈등의 골만큼 신덕왕후를 미워했다. 태조가 세상을 떠난지 1년만에 신덕왕후의 능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1406년 정릉의 능역이 도성 안에 위치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능역 또한 너무 넓다는 논란이 있자 태종은 정릉 100보 앞까지 주택을 짓게 허가했다. 하륜 등 당대 세도가들이 정릉의 숲을 베어내고 저택을 지었다. 1409년엔 아예 현재 위치로 능을 옮겼다.

능을 옮긴 지 한달만에 태종은 봉분을 깎아버리고 정자각을 헐었으며, 석물을 모두 땅에 묻도록 했다. 심지어 1410년 청계천의 광통교가 홍수로 무너지자 정릉의 석물로 쓰던 병풍석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들게 했고, 그 밖의 목재나 석재는 태평관을 짓는데 사용했다.

권 연구원은 “그래서 현재 정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능의 장명등과 혼유석만 원래의 것이고, 나머지 석물들은 모두 복원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정릉은 수 백년간 조선을 건국한 왕후의 무덤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방치돼 있었다. 1669년 현종 10년에 이르러 비로소 송시열의 청에 의해 보수돼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됐다.

유독 나무가 무성한 왕릉 진입로

금천교를 지나 정릉으로 진입하는 공간에는 유독 수목이 많았다. “신성한 공간인 능을 보호하고 감추기 위해서”라고 권 연구원은 설명했다. 원래 화재에 대비해 연못도 있었지만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권 연구원은 “원래 정릉은 재실도 없었다”며 “지금 재실 복원 공사 중”이라고 말했다.

시간탐험대 대원들은 홍살문에 이르렀다. 2개의 붉은 기둥 위 살이 촘촘히 박혀 있다. 이 문을 지나 왕은 정자각으로 향한다. 정자각으로 가는 길을 신도라 부르는데, 자세히 보니 길의 위쪽은 좀더 높고 아래쪽은 낮다. 권 연구원이 묻는다. “이 중에 임금이 걸어가는 어도는 어디일까요?” 몇몇 대원이 답한다. “높은 쪽, 위가 아닐까요?”

땡. 위쪽 길은 무덤의 주인, 즉 혼령이 지나는 길이다. 참도라고 부른다. 살아있는 왕은 참도의 아래에 있는 낮은 길, 어도로 걸어간다. 정자각을 오르는 계단도 같은 원리다. 무덤의 주인이 오르는 계단은 구름무늬 장식으로 화려한 반면, 살아있는 왕이 오르는 계단은 군더더기 없이 소박하다.

왕은 능에 오르지 않았다?

정자각을 지나 능으로 향한 시간탐험대와 달리 왕은 정자각에서 제사를 지낼 뿐 능에 오르지는 않았다. 잔디가 잘 정돈된 봉분(능침)이 눈앞에 나타나자 권 연구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봉분이 위치한 곳을 능침 공간이라고 부릅니다. 봉분 앞 제단인 탁자 모양의 혼유석에는 실제로 제물을 놓지 않았어요. 제사는 정자각에서 지냈기 때문이죠.” 능침 공간은 위쪽에서부터 왕의 영혼이 깃드는 상계, 문인의 공간인 중계, 무인의 공간인 하계로 나뉜다. 상계에는 봉분·혼유석 등이 자리하고, 중계에는 장명등과 문인석과 석마, 하계에는 무인석과 석마를 세웠다.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인 능침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됐다. 능침 공간의 유물들은 상당수가 복원된 것들이다. 장명등·혼유석만 실제 정릉의 것이고, 문인석과 석마 등은 모두 후세에 만든 것이다.

능 정상에서 시간탐험대의 답사는 마무리됐다. 태조는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두 사람 사이의 자식들이 왕자의 난으로 모두 살해되는 참극을 겪어야 했으며 죽어서 신덕왕후 곁에 묻히길 바랐던 소망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슬픈 결말의 러브스토리인 셈이다.

시간탐험대의 썰전
고려 말 혼란 속에서 누구를 따를 것인가

정릉 답사를 마친 뒤 정자각 앞뜰에서는 작은 토론시합이 펼쳐졌습니다. 이조와 예조, 병조와 공조, 한성부와 문화유산국민신탁 연구원이 각각 팀을 이뤄 한 가지 주제로 치열한 썰전을 벌였는데요, 사전에 준비한 빽빽한 연설문까지 등장했습니다. 이중 병조와 예조의 뜨거운 토론현장을 함께 살펴볼까요.

정도전파 박서현 | 고려는 이미 부패해 단순한 개혁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정몽주파 안현준 | 나라를 갑자기 바꾸는 것은 백성들에게 혼란을 주는 길이다. 또한, 태조 이성계는 신하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충성을 어기고 고려의 왕을 배신했다.

‘정도전의 개국이 옳다’ 는 주장을 펼친 예조 시간탐험대원들.

정도전파 엄진용 | 충성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충성의 대상은 왕이 아니라 백성이다. 백성에게 충성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정몽주파 황수민 | 백성들이 모두 고려의 멸망을 원했다고 볼 수 없다. 정몽주의 뜻에 동의하는 백성이 더 많았을 수도 있다. 정몽주의 사상은 조선시대에도 사림의 정신으로 계속 명맥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정도전파 박서현 | 새 나라를 세우지 않는다고 고려가 혼란스럽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다. 고려 말은 이미 갖가지 문제들로 혼란한 시기였다.

정몽주파 안현준 | 고려 말에 질서가 어지러워지긴 했지만 나라가 바뀌는 혼란에 비교할 수 없다. 국교까지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면서 수많은 백성들이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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