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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③문화] 스타, 일상의 삶에 파고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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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석(영산대 교수·철학)

대중문화는 없다. ‘사람들의 문화’가 있을 뿐이다. 굳이 대중문화가 있다면 말의 쓰임새로서 존재할 뿐이다. 오늘날 문화의 생산, 소비, 그리고 향유는 일정 범주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되도록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이는 한때 고급문화라는 범주에 있던 소위 클래식 예술이 미술·음악·문학 등 각 장르에서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60년대 들어 사람들의 문화로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이른바 대중문화의 힘은 약했고, 일부 사람들의 문화였던 고급문화는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문화가 될 수 없었다. 20세기 후반에서야 대중문화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문화’가 되기 시작했다.

1960~70년대는 대중문화가 사람들의 문화가 되기 위해 발호하는 시기였다. 또한 문화의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기였다. 68학생운동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청년 운동은 문화의 정신이 지구촌 어디까지 침투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한국의 통기타 문화도 그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정치적으로는 국지전이었지만, 그에 대한 맞바람의 문화가 세계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폭력적 정치구조에 대한 인간의 저항문화가 세계화하는 전형이었다.

60~70년대 문화는 세계적으로도 국내적으로도 이미 미래의 문화였다. 이런 의미에서도 대중문화는 세대를 넘어 통시적으로 사람들의 문화가 된다. 민주화 운동으로 치열했던 80년대 많이 듣던, 그러면서도 금지곡이었던 노래의 대부분은 70년대 통기타 가수들이 불렀던 것이었다. 양희은과 김민기의 ‘아침 이슬’이 그 대표적인 예다. 77년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를 21세기 벽두 개봉한 ‘박하사탕’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듣는 건, 단순히 복고풍 때문이 아니라 70년대 ‘사람들의 문화’가 지닌 통시적 힘 때문일 것이다.

인물의 신화와 하이퍼 스타

문화가 곧 사람이고, 사람이 곧 문화다. 이는 현대 문화가 ‘인물의 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그것을 지향하는 이유다. 문화산업이 스타를 만들고 상품화한다는 비판은 이제 진부할 정도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을 갈구한다. 문화산업이 스타를 생산하고 조작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일상에서 ‘친숙한 사이’로 두고 싶은 근원적 심리는 존재한다. 문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매개하며 이런 원초적 심리를 충족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할리우드 시스템은 인물의 신화를 확산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 자체가 무엇보다도 ‘얼굴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문화 생산자의 정체를 안 이상 그가 창출하는 작품 이상으로 그 인물과 ‘친구’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억제하기 힘들어진다. 결국 현대 대중문화, 아니 사람들의 문화는 인간 관계를 맺게 하는 데 특별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상문화가 일반화하기 전까지의 문화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다. 더구나 뮤직비디오와 MTV를 거쳐 디지털 영상이 인터넷상에서 편재하는 시대에 인물의 신화는 더욱 일상화한다.

‘나는 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영상문화 시대의 일반적 실존 명제일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 실존 명제는 이럴 것이다. ‘그를(그녀를) 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를 한창 신나게 하는 ‘한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겨울연가’는 망각할지 몰라도 배용준은 잊지 못한다. ‘문화는 사람을 싣고’교류한다.

더구나 오늘날 인물의 신화는 더 이상 스타나 수퍼스타의 이름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21세기 영상문화산업은 다양하게 링크된 세상에서 이윤을 창출하고 그 영향력의 지평을 사방으로 넓혀간다. 말하자면 일종의 하이퍼월드(Hyperworld)를 형성한다. 하이퍼월드에서는 당연히 수퍼스타가 아니라 하이퍼스타(Hyperstar)가 힘을 발휘한다. 높은 곳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면서 빛을 발하는 별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 삶 곳곳에 침투해 보석처럼 아끼고 싶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천상의 별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보석이기에 사람들은 하이퍼스타에 더욱 열광하며 그 존재를 더욱 현실처럼 받아들인다.

섹슈얼리티와 문화변동

사람에게 관심을 두면서 성(性)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문화담론에서 섹슈얼리티와 문화라고 하면, 주로 여성의 몸이 어떻게 문화 생산과 소비에서 이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다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과 여 모두에서 어떻게 성적 정체가 변화하고 다양하게 표출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문화변동의 이해에 더 본질적일지 모른다.
성적인 것을 담고 있지 않는 문화는 없다. 60년대 문화의 성적 상징은 유니섹스였다. 이는 그 후 한 세대를 풍미했다. 유니섹스는 남녀의 구별을 없애거나 모호하게 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외모상 남성의 여성화이자 여성의 남성화이기도 했다. 이런 경향은 개인의 모습을 흐리게 한다. 그 시대에 중요한 건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9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성적 상징은 ‘양성화’다. 즉 남성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모두 표출하려 하며, 여성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꽃미남은 남성의 여성화가 아니다. 남성의 여성적 표현이며, 그 남성은 남성적 표현에도 열심이다. 이른바 몸짱 만들기가 그것이다. 권상우의 얼굴과 몸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일종의 ‘성간(性間) 넘나들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또한 이 시대에 중요한 것이 개인이라는 걸 보여준다. 지금까지 문화변동은 섹슈얼리티의 영향을 깊이 받아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구의 문화인가’에 대한 답은 ‘사람들의 문화’다. ‘문화는 또 어떻게 변할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의 키워드는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인 것이다.
김용석(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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