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장사하는 법은 … ” 창고 개조한 도서관서 논어 읊는 시장 상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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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북구 수유시장의 금요일 저녁은 논어 강의로 채워진다. 지난 14일 수유마을 작은도서관에서 이재권(맨 왼쪽) 관장 등 시장 상인들이 수업을 마친 후 황희경(왼쪽 네번째) 교수와 함께 밝게 웃고 있다. 이들은 “전통시장의 위기를 인문학으로 극복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경빈 기자]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의 직업은 시장 상인이었다. “이익보다 의(義)를 우선하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실천해 거상(巨商)으로 성공한 뒤 위나라 재상에 올랐다. 서울 수유시장에도 21세기의 자공을 꿈꾸는 상인들이 있다.

 지난 14일 오후 7시 수유시장 상인회 건물 2층에 있는 ‘수유마을 작은도서관’. 황희경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교수가 화이트보드에 큰 글씨로 ‘制怒(제노·노여움을 다스리는 법)’라 적고는 한자가 빼곡히 적힌 유인물을 나눠줬다.

 이날의 교재를 받아든 두부가게 박진효(51)씨는 “화를 다스리려면 옥편부터 찾아야 쓰겄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강연에는 박씨를 포함해 상인 9명이 참석했다. 황 교수가 『논어』 옹야편 3장 ‘불천노 불이과’(不遷怒 不二過·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를 인용해 설명하자 상인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불의를 참지 못해 내는 화도 나쁜 건가요.” “화를 내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는 방법은 없습니까.” 황 교수의 답이 이어졌고, 상인들은 그 얘기를 노트에 열심히 받아적었다.

 매주 강의가 열리는 수유마을 작은도서관은 22년째 시장에서 생선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이재권(51)씨가 세웠다. 2010년 봄 상인들끼리 책을 돌려읽던 이씨는 문득 ‘시장 안에 도서관을 만들어 상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자’는 생각을 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인 ‘문전성시 프로젝트’의 도움을 받아 도서관 운영팀을 꾸렸다. 상인들에게서 책을 기부받고 사비를 보태 상인회 사무실 옆 창고를 지금의 도서관으로 꾸몄다. 13평 남짓 크기의 도서관에 문학·경제·사회과학·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 3000여권이 채워졌다.

 도서관이 만들어지자 독서동아리가 생겨났다. 동아리 이름은 ‘반딧불이’. 그러다 선생님을 모셔서 정식으로 배워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씨는 “돈에 얽매여 살다보니 정신적 빈곤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도 인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매달 3000~5000원씩 후원계좌로 보내는 상인들의 기부금으로 지난해 가을 처음으로 인문학 강좌를 시작했다. 서양고전학연구소 김인곤 박사가 서양철학 강연을 맡았다. 20여명의 상인들이 지난해 강좌를 들었고, 올해는 30명이 넘는 상인들이 동양철학 강의를 신청했다. 내년 강의 계획도 나왔다. 세계사다.

 이들의 공부엔 이유와 목적이 분명했다. 잡화가게를 운영하는 강경찬(59)씨는 공부를 통해 ‘시장의 은자(隱者)’가 되고 싶다고 했다. “돈만 아는 무식한 상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속옷가게 노춘호(51)씨는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어 강의를 신청했다”고 말했다. 두부가게 박진효씨는 “수처작주(隨處作主·어느 곳에서든지 주인이 되라)의 마음으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두부 한 모에 손님의 행복을 담아 판다”고 했다. 은행원 김명화(46·여)씨는 “마음 쓰는 것은 거울과 같다(用心若鏡).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고객들에게 늘 웃는 모습을 보여주게 됐다”고 말했다.

 수유시장의 도서관과 철학강의는 지난 1일 경남 창원에서 열린 전국우수시장박람회에서 우수사례로 선정됐다. 도서관 운영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전국 곳곳의 시장 관계자들도 이 도서관을 찾아오고 있다.

글=장혁진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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