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도청 '핵폭풍'] 'YS·DJ맨' 줄줄이 조사 받을 듯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 검찰 수사관들이 27일 전 미림팀장 공운영씨의 성남시 정자동 자택 압수수색을 마친 뒤 압수품을 차에 싣고 있다. 김태성 기자

검찰이 안기부 전 미림팀장 공운영씨 집에서 불법 도청 테이프를 대량 압수한 것을 계기로 문민정부 시절 안기부가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상대로 무차별적 도청을 저질러왔음이 사실로 드러났다.

이건모 전 국정원 감찰실장이 28일 공개한 자술서에서 "사회 모든 분야에 걸친 붕괴가 올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판도라의 상자'가 마침내 검찰의 압수수색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검찰은 천용택 전 국정원장 등에 대한 출국금지를 시작으로 안기부의 비밀도청팀인 미림팀의 설립과 운영, 도청 자료의 악용 실태 등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조사에 나섰다.

검찰은 미림팀이 생겨나 활동이 중지될 때까지 미림팀을 통한 정보 생산.유통은 노태우.김영삼 정부 시절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김대중 정부의 핵심 실세들도 미림의 존재를 알고 불법 자료를 접했던 정황 등이 속속 나오고 있다.

◆ 불법 도청 지시.실행자=공씨가 상부의 지시로 미림팀장에 복귀한 것은 1994년. 이때부터 공씨는 3명의 팀원과 함께 정.관.재.언론계 등의 최상층부 인사들끼리의 대화 내용을 마구잡이로 도청했다. 전 국정원 직원 김기삼씨는 "문제의 도청 자료들이 오정소 당시 대공정책실장을 거쳐 김현철(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씨, 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전달됐다"고 말했다.

당시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 박상범 경호실장 등이 갑자기 낙마한 것도 미림팀의 도청 자료를 김현철씨가 아버지에게 보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김씨의 주장.

미림팀 재구성과 미림팀에 불법 도청을 지시한 사람에게는 형법상의 직권남용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공소시효 5년은 이미 지났다. 김현철씨의 경우는 공무원이 아니라서 이 혐의가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검찰은 김현철씨 등 공씨의 불법 도청 내용을 보고받은 비선라인 관계자들에 대해서는 진실 규명 차원에서 철저하게 조사할 방침이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면조사 등을 받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 92~97년 사이 도청에 직접 가담한 공씨와 미림팀원들의 불법 도청 행위 자체는 통신비밀보호법 공소시효(7년)가 지나 처벌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공씨가 99년 전 국정원 직원이던 임모씨, 재미동포 박인회씨 등과 함께 삼성을 찾아가 돈을 요구한 행위와 이 과정에서 불법 도청한 녹취록을 제시.유출한 행위는 통비법 위반이다.

◆ 도청 자료 유출 묵인.활용=국민의 정부 실세였던 천용택 전 국정원장은 99년 말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DJ가 정치자금법 개정(97년 11월 14일) 전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말 실수를 했다. 그가 도청 내용을 알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해석이다. 천 전 원장이 퇴임하면서 일부 도청 자료를 갖고 나가 다른 인사들에게 내용을 알렸다면 불법행위로 얻은 자료를 공개.누설하지 못하도록 한 통비법으로 처벌이 가능하다. 그가 공씨가 불법 도청 테이프 등을 외부로 유출한 사실을 적발하고도 사법처리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직무유기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공소시효 3년이 지나 처벌은 어렵다.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99년 불법 도청 테이프의 녹취록을 재미동포 박인회(구속)씨로부터 넘겨받은 사실은 29일 발부된 박씨의 구속영장에 적혀 있다. 박 전 장관은 당시 공씨를 복직시켜 달라는 청탁과 함께 도청 자료를 받았다.

박 전 장관이 이때 얻은 녹취록을 외부인사들에게 공개하거나 알렸다면 통비법 위반 혐의로 사법처리할 수 있다.

검찰 관계자는 "삼성그룹의 경우 공씨 등의 금품 요구를 거절했지만 공씨 등의 또 다른 도청 자료에 등장하는 사회 고위층 인사들이 협박에 넘어갔을 가능성도 있다"며 "공소시효와 상관없이 도청 문제의 진실을 찾는 수사를 벌이겠다"고 밝혔다.

조강수 기자 <pinejo@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