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과 현실 사이서 정부 고심|사실 왜곡…일 공식 태도와 정가 반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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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일본 역사 교과서의 사상 왜곡 파문은 여론의 집중 포화가 있은지 보름만에야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 전달됐지만 조만간 진정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30일 하오 일본측은 『한국민의 감정과 여론을 충분히 이해한다』 『비관과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생각이다』고 외무부에 공식 통고해 왔으나 구체적으로 「시정」하겠다는 말은 없었다. 지난 6월말 새 교과서 시작본이 나오면서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역사 왜곡 문제를 국내 언론이 크게 보도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주부터. 그러나 외무부가 진상을 파악해 보고하라는 훈령을 보낸 것은 그로부터 거의 1주일이 지난 23일이었다.
30일 외무부 당국자들은 주일 한국 대사관의 보고 내용을 때마침 열리고 있던 국무회의에 보고하랴, 뒤이어 들이닥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 내용」을 분석하랴 한동안 숨가쁘게 움직임. 1시간여의 구수 회의 끝에 기자실에 들른 공로명 제l차관보는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일본 정부가 전달한 「공식 입장」을 브리핑. 그 동안 강온의 갈림길에서 적지 않은 고민을 해왔던 외무부 당국자들은 문부성과 외무성이 전달한 내용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는 「비교적 정중하고 성실한 내용」으로 평가하고 어느 정도 안도하는 표정.
그동안 정부의 접근 방식은 한마디로 「신중한 자세와 느린 템포」로 요약된다. 정부는 우선 이번 사태의 대응에 있어 「엄중 항의와 강력한 시정 요구 보다는 「일본 정부의 조치를 예의 주시하면서 적절한 단계적 대응 조치를 취한다」는 자세였다. 이러한 정부의 대응은 폭발 일보전의 국민 여론을 속시원히 수렴하기에는 미흡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느린 템포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한 최선책」이라는 것이 관계 당국자들의 설명.
가령 정부가 강경한 외교적 대응을 한 연후에도 일본 정부의 교과서 내용 시정 조치가 뒤따라 주지 않으면 정부로서는 당장에 쓸 「대응 카드」에 궁색해진다는 이유도 신중론의 한 배경이었다.
정부의 대처가 국민 감정을 따라가지 못한데는 한일간에 얽혀 있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일본의 집권 자민당은 그들의 민족주의와 국민 일체감을 고양시킨다는 차원에서 교과서 개정을 시도했다고 하는데 이 개편 추진파는 아직도 과거에 집착해 있는 「올드·제너레이션」들이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일본 안에서는 당초 일본 사회당과 공산당에 의해 문제점이 제기됐고 사회·공산당과 이념의 궤를 같이하는 중공과 북한 등이 적극 나서는 면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 친한파라는 사람들 중에 교과서 개편을 추진하는 우익 인사가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당장의 비등한 국민 감정을 가라앉히려면 기존의 한일 우호 관계를 본질적으로 재검토해야만 한다는데 당국의 또 하나의 고민이 있다.
이번 일로 인해 과거 소위 친한파라는 사람들의 색깔이 확연히 드러난 셈이다. 때문에 정부는 최악의 경우 현재 진행 중인 한일 경협 교섭 등 모든 한일 관계를 「제로·베이스」로 돌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까지 해야 하느냐를 놓고 심각한 고민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당장 교과서 문제와는 연관짓지 않더라도 친한파 의원을 장기적으로 새로운 컬러로 재구성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교과서 문제에 대해 민정당은 신중론으로 일관해 왔다.
지난주 한병채 문공위원장이 국회 문공위 소집 필요성을 강조하고 3당 간사끼리 소집 원칙에 일단 잠정적인 합의를 보았다가 당으로부터 상당한 꾸지람을 받기까지 했다.
민정당의 기본 입장은 공식적으로는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고, 국민적 차원에서는 적극 대처한다는 양면 작전. 26일 열린 당직자 회의, 중앙 집행위에서도 당으로서 강력히 대처하자는 요구도 나왔지만 전반적인 무드는 여전히 『정부측의 조치를 지켜보면서 대응하자』는 신중론이 우세했다.
한일 의원 연맹 관계자들과 가진 회의에서 최근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박경석 의원은 『교과서 왜곡에 분개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교과서 왜곡을 시정하는 문제와 장기적인 한일 관계는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해 참석자들의 공감을 얻었다는 얘기다.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에 관한 민한당의 반응은 이상 할이 만큼 신중했다. 문제가 언론에 클로스업 된 직후 열린 외무·문공위위원 연석 회의에서도 『상임위 소집을 섣불리 하지 않는게 좋다』는 쪽이 우세했다.
임종기 총무는 『이종찬 민정당 총무가 귀국한 후에 문공위 소집을 논의하겠다』는 것을 표면적인 이유로 내세웠지만 실은 대일 문제에 대한 정부의 평소 대응 자세에 적잖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워낙 국민 감정이 앞서는 문제라 말은 조심했지만 상당수의 의원이 같은 생각이다. 일본 정부의 태도는 규탄해 마땅하나 교과서 문제가 새삼스런 것이 아니란 얘기들이다.
손세일 의원 같은 이는 이런 문제는 학문적 교류를 통해 사전에 시정했어야 했다고 했고, 허경구 의원은 일본 신문에 의해 먼저 제기된 문제에 대해 우리가 지나치게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스럽다고 했다.
국민당도 정부 당국의 무책임에 대해서는 비슷한 견해. <전육·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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