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불법 도청이 핵심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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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른바 X파일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재벌그룹과 주요 언론사 사주 및 주요 정치인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건이니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나, 법조인의 입장에서만 보면 사태의 전개상황이 우려되는 바가 적지 않다. 특히 X파일을 취재하고 터뜨린 언론사의 보도방향이 도청된 대화내용에 집중되고 이에 따라 여론의 관심도 그 부분으로 쏠리는 점이 염려된다.

이 사건의 주요 내용은 ① 국가기관이 불법 도청을 광범위하게 행하였고, 그 와중에 재벌그룹 간부와 언론사주 간에 정치자금 제공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도청되었다. ② 도청업무에 종사하던 공무원이 퇴직하면서 도청 테이프를 갖고 나왔다. ③ 그 테이프를 무기로 재벌그룹에 대한 공갈이 행하여졌고, 그 협박이 성공하지 못하자 테이프를 방송사에 넘겼다는 것이다.

법률가의 견해에서 보면, 세 가지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첫째다. 이는 국가권력이 헌법의 기본권 조항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근대 헌법은 국가제도를 운영함에 있어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첫째 의무로 하였고, 국민이 자유로운 사생활을 설계하고 누리는 것, 타인으로부터 사생활을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는 국민이 갖는 기본권 중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권력이 도청 등의 불법수단으로 국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결코 용서될 수 없는 범죄이고, 공소시효의 완성과는 별도로 그러한 범죄행위가 이루어진 경위, 지시 및 행위주체 등을 규명하여 행위자들을 공직에서 배제하거나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고, 제도를 정비하여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만드는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공갈범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테이프를 언론사에 공개한 A씨의 목적이 협박에 응하지 않은 재벌그룹에 대한 응징이었는지, 다음의 협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든 그 목적을 이루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점에서 도청된 내용의 불법만을 문제삼는 현재의 보도태도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A씨가 또 하나의 테이프를 갖고 있고 그 테이프로 다른 재벌그룹을 협박하여 돈을 갈취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여 보자. 현재와 같이 도청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명예 등이 침해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민단체에 의하여 형사고발까지 당하는 현실에서 다른 테이프에 나오는 사람들이 공갈에 굴복할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질 것이다. 또한 위 테이프의 내용만이 문제되는 일이 계속되면, 국가권력은 야당 등에 대한 도청을 통하여 야당의 치부를 알아낸 뒤 이를 언론에 흘리는 방법으로 정치적 우위에 서려는 유혹을 받게 될 것이고, 이는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자유민주사회와는 전혀 반대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도청 등을 통해서라도 범죄를 적발하고 이를 처벌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는 생각은 정말 위험한 생각이다. 역사는 나치독일 등의 예에서 국가권력이 적법하게 통제되지 않았을 경우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빚게 되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재벌그룹, 보수언론에 대한 책임추궁보다 먼저 도청의 불법성을 따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형사소송법에는 '위법수집증거 배척의 원칙'이 있다. 아무리 범죄의 증명에 합당한 증거라도 그것을 수집함에 있어서 불법을 용인한다면 하나의 범죄는 적발할지 몰라도 수많은 다른 사건에서 수사기관의 불법을 용인하는 결과가 되고, 이는 국민에게 더 큰 불이익을 주는 결과가 된다는 경험에 의하여 확립된 것이다. 이 원칙의 취지는 이번 도청을 둘러싼 언론보도에 관해서도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도청도 없고, 공갈도 없으며, 모든 범죄가 적발되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선택하여야 하는 것은 하나의 범죄를 막기 위해 광범위한 불법 도청이 행하여지는 것을 방치할 것인지, 불법 도청을 엄격히 금지함으로써 하나의 범인을 놓치게 되는 결과를 감수할 것인지이며 법률가의 눈으로 보면 그 선택은 자명하다고 생각된다.

강 훈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