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기업 먼저! 정부 먼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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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정부 경제정책의 사령탑과 재계의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 부진에 빠진 한국 경제에 대해 논했다. 하지만 인식과 처방은 달랐다. 강신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규제가 기업을 옭아매고 있다고 비판한 반면, 한덕수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기업이 규제 탓만 하면서 투자를 게을리한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28일 제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여름포럼 자리에서다.

"기업은 정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과도한 표현을 써가며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다."

한덕수 부총리는 포럼의 기조 강연과 뒤이어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재계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합리적이고 조용한 스타일인 그가 작심한 듯 보였다. '과도한 표현'은 재계가 성명서 등으로 의사표시를 하는 방식을 지적한 것이고, '과도한 요구'는 틈만 나면 제기하는 재계의 규제 완화 요구를 겨냥한 것이다.

한 부총리는 기조연설에서 "정부와 기업은 서로 대립하는 구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재계가 성명서를 발표하는 방식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다"며 "좀 더 원숙한 협의와 논의 절차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한 부총리는 현 정부의 대기업 규제와 노동.교육 정책은 시장경제 원리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고 역설했다.

기조연설 후 한 기자간담회에서는 목소리를 좀 더 높였다. 한 부총리는 "기업이 정부를 굉장히 불신하고 있는 듯하다"며 "기업인들은 '저런 비합리적인 사람들(정부)에게는 데모하듯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한 부총리의 이 같은 비판은 재계의 소극적인 투자 활동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됐다. 그는 "현재 기업들이 70조원이나 되는 현금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투자는 너무 신중하다"고 꼬집었다. 그는 "기업들은 투자하지 못하는 이유로 출자총액제한제도나 정부 정책의 불투명성만 꼽고 있다"고 비판한 뒤 "기업 스스로 수익 모델을 못 찾았거나 연구개발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재계에 직격탄을 날렸다.

"기업 지배구조나 기업 투자와 관련된 규제를 개혁하지 않고는 경제가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강신호 전경련 회장은 포럼 기조 연설에서 기업 규제 개혁이 투자 활성화의 첫걸음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잠재 성장률을 높이고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기업 투자 활성화가 절실하다"며 "이를 위해 규제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말했다. 강 회장은 "오늘날 시장은 국경을 넘고 있다"며 "정부는 치열한 국제 경쟁 속에서 기업들이 더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도록 좋은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명시적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기업의 발을 묶고 있는 출자총액제한 제도 등을 겨냥한 발언이다. 강 회장은 시장경제 원칙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평등주의에 대해서도 각을 세웠다. 그는 "노사관계.교육과 같은 여러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지나친 형평성 논란에 휩싸여 좋은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정부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경제 활동을 조장해야 한다. 정책이 시장경제 원칙에서 벗어날 때 경제 효율은 떨어지고 우리의 성장 잠재력은 쇠퇴할 것"이라며 정부 정책에서 시장경제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꼬집었다. 그러나 강 회장은 기업의 분발도 촉구했다. "글로벌화 시대에서는 이긴 편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만큼 기업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경쟁력 있는 신제품을 만들든가 제품의 새로운 용도를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X파일 사건'이나 '두산그룹 경영권 분쟁'으로 촉발된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했다는 것이다.

제주=이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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