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좌절에도 멈추지 않은 포교 … 유물 1400점, 동학을 증언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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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주희 남접대도주 후손들이 상주 동학교당 유물을 둘러보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지난 14일 경북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 동학교당. 상주시청에서 서북쪽으로 25㎞쯤 떨어진 산간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길을 안내한 김상호 상주시 문화재담당은 마을 입구에서 “밖에서는 전혀 교당이 보이지 않는 지형”이라며 “들어가는 길은 딱 하나”라고 설명했다. 한쪽에는 성주봉이, 맞은 편엔 문경과 경계를 이루는 칠봉산이 둘러싼 마을이다. 숨어 지내기 좋은 곳이다.

‘동학교당’이라 쓰인 행랑채를 들어서니 ‘口자’로 사면에 배치된 초가집이 나타난다. 인기척을 듣고 안 노인이 나왔다. 1910년대 이곳에 숨어들어 동학교당을 세우고 이끌었던 김주희(1860∼1944) 남접대도주의 며느리 곽아기(89) 할머니다.

“열여섯에 시집 왔을 때만 해도 이곳으로 참 많이 모여들었지요. 시아버지는 사랑채에, 부교주는 저 행랑채에 머무른 기억이 납니다.”

연락을 받고 들에서 일하던 곽씨의 아들 김정선(65)씨가 돌아왔다. 그는 교당 건물 바깥에 들어선 유물전시관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입구에 국가지정기록물(제9호)과 도 민속자료(제111호) 지정서가 붙어 있다.

진열장에는 의식 때 입는 각종 예복과 깃발·인장·생활용품, 동학 경전과 가사 등이 전시돼 있었다. 모두 1400여 점. 양도 많고 보관 상태도 양호했다. 전시 유물만 봐도 당시 상주 동학교당의 세가 만만찮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김씨는 “1943년 일제가 유물 일체를 압류해 경찰서에 두고 있었는데 광복을 맞아 갑자기 철수하는 바람에 보존된 것”이라며 “아쉬운 것은 당시 신자 이름을 적은 교적부가 사라진 점”이라고 설명했다.

유물전시관 한쪽에는 수장고가 있었다. 웬만해선 공개하지 않는다는 수장고에 들어갔다. 마침 국가기록원 직원들이 자료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 동학의 경전은 물론 각종 가사를 찍은 목판과 인쇄 도구, 교당에서 사용하던 깃발 위에 달던 용·봉황·호랑이 문양을 한 기두 등이 보존돼 있었다. 자료도 방대하다. 동학 관련 기록 유물로는 이만한 곳이 없다는 게 연구자들의 견해다.

 김씨가 전한 상주 동학교당의 연원은 이렇다. 1894년 동학농민군은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한다. 공주에 있던 김주희는 속리산으로 숨어들어 1904년 경천교를 만들고 안동에서 김낙세를 만나 땅을 사들인 뒤 1915년 이곳에 동학본부를 차렸다. 모여든 교도들은 동학을 포교하고 포교사를 배출하는 학교를 운영했다. 그는 1943년까지 포교를 벌인다. 지금 이 분파는 동학교로 부른다.

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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