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현인택 고려대 교수·전 통일부 장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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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제 몫으로 지고 있는 짐이 무겁다고 느껴질 때 생각하라,

얼마나 무거워야 가벼워지는지를. 내가 아직

자유로운 영혼,

들새처럼 날으는 영혼의 힘으로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 짐이 아직 충분히 무겁지 못하기

때문이다.

- 정현종(1939~)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 중에서

20대 중요 순간에 길잡이 된 시
인간적 성숙 쌓았나 자성 이끄네

시를 잊고 살았다, 오랫동안. 세파에 파묻혀 시를 찾는 여유로움을 갖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그러나, 오히려 현실의 벽에 부닥쳐 정신적 갈증이 심했던 20대의 어느 날 한 편의 시가 나를 깨어나게 했다.

 1970년대 중·후반, 시대의 무거운 공기와 청춘의 고뇌 속에 갇혀 있던 젊은 시절이었다. 정현종의 시구 하나가 내 뇌리를 강하게 두드렸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날고 싶다면 더 무거운 짐을 져야 한다는 그의 철학적 시어가 나를 미망(迷妄)에서 깨웠다. 세상의 무게가 아니라, 아직 ‘충분히 무거워지지 않은’ 내 자신의 무게가 나를 날지 못하게 한다는 그 역설적 의미가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한 깨달음 때문일까, 나는 학문을 더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국제정치를 택한 건 소명 같은 것이었다. 통일정책을 다루는 치열한 현장, 살얼음을 딛는 듯한 이성의 세계 속에 묻혀 살았다. 가끔 거기서 빠져나와 감성의 세계에서 나를 바라보고 싶다. 정현종 시인은 말한다. “나는 내 운명이 이미 결정돼 있음을 모르고 운명을 개선하려 했다/그러나 내 운명이 결정돼 있음을 알았을 때 나는 내 운명이 바뀌는 소리를 들었다.”

 겸허하게 운명과 마주 서면 자유로운 날갯짓이 가능할까?

현인택 고려대 교수·전 통일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