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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도 SOS박스도 빨강 … 불나면 헷갈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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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안내 표지판은 많은데 광고판이 넘쳐나 지하철 출구 방향을 찾으려면 전문가인 나도 헷갈려요. 평소에도 미로 같아 복잡한데 만약 화재나 테러가 발생하면 어떨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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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 본지 취재팀과 함께 서울역·시청역을 둘러본 최성호 한양사이버대 교수는 안전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서울 지하철의 디자인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는 지하철 설계·감리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공간디자인 전문가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쾌적해 보일지 몰라도 전문가인 최 교수의 눈에 지하철 안전 문제점이 수두룩하게 지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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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호 교수가 본지 취재진과 함께 서울 시청역 등의 디자인 안전 문제를 점검했다. [김성룡 기자]

 취재팀은 화재 발생을 가정해 눈을 가린 채 서울역과 시청역에서 비상 탈출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불이 나 지하에 시커먼 연기가 가득할 경우 1m 앞도 분간이 잘 안 된다. 당황한 시민들은 벽을 더듬거나 바닥 표지판을 살피며 이동하게 된다. 시청역 1호선 승강장 한가운데에서 회색 벽을 잡고 이동을 시도했다. 몸을 약간 굽힌 채 1m 높이 벽면에 손을 대면서 앞으로 나갔다. 대피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승강장 내부 시설물 설치를 최소화해야 맞다. 하지만 약 5m를 더듬다 보니 쓰레기통과 음료 자판기가 앞을 가로막았다. 지하철 운영업체가 설치한 공기질 측정기도 길을 막았다. 10m를 더 진행하자 이번엔 매점이 앞을 가렸다.

 매점은 지난해 실시한 시청역 리모델링 설계에서는 없애는 방안을 논의했으나 슬그머니 다시 들어섰다. 최 교수는 “민원 때문에 못 없앤다면 대피로를 가리지 않도록 배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이런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가이드라인은 수차례 발표됐지만 강제 규정이 없어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하철역 디자인 가이드라인은 1983년부터 여섯 번이나 만들어졌다. 하지만 대부분 강제력이 없는 권고사항이다. 2008년 ‘지하철정거장 환경 디자인 가이드라인’엔 피난 때 시야 확보를 위해 소화기 보관함 등 안전설비 주변에는 광고·자판기 등을 설치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승강장에 설치된 자동판매기에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거나 간이매점이 150cm 높이에 상품을 진열하는 행위도 금지했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지하철역 내부의 시설물 바닥에 표시된 방향 정보도 쉽게 찾기 힘들었다. 소방법에 따르면 20m 간격으로 초록색 비상구 표시가 설치돼야 하지만 색이 바랬거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일본은 벽면 하단부를 형광색 띠로 연결해 탈출로를 분명하게 표시한다.

  최 교수는 “출구 표시를 1.9~2m 높이에 설치해 사람 키에 가려 표지판이 안 보이는 경우가 많다”며 “길 안내 표지판은 누구에게나 잘 보이도록 천장 바로 아래에 위치를 바꿔 설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지적은 192명의 사망자를 낸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직후에 제기됐지만 아직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지하철에 비치된 방재도구들은 분산돼 있어 사용하기 힘들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빨간 형광색 SOS 마크가 보이는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비상연락 버튼이 있는 SOS 박스는 4m 떨어진 벽에 붙어 있었다. 심지어 비상용 손전등은 소화전에서 10m 떨어진 벽에 붙어 있었다. 화재 때 착용하는 방독마스크 박스는 SOS 박스 주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최 교수는 “각종 방재도구들을 한 곳에 모아놓는 것이 상식”이라며 “하지만 대부분 지하철은 소방 규정에 따라 수량만 맞출 뿐 사용자가 쉽게 쓸 수 없게 돼 있다”고 말했다.

 형형색색의 광고들이 도배돼 있는데도 방재도구들의 색깔과 디자인이 통일되지 않아 식별하기 힘들었다. 소화기는 빨간색 그림으로 그려진 곳도 있고, 소화기라는 글씨만 쓴 곳도 있었다. 응급전화기는 서울메트로가 빨간색, 도시철도공사는 노란색으로 제각각이었다. 최 교수는 “노란색은 탈출구, 빨간색은 방재시설과 금지표시라는 원칙이 무너진 경우가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영국·일본·중국 등 지하철을 운영하는 거의 모든 나라는 스크린도어 광고를 금지하거나 설치 높이를 1m 이하로 제한한다. 영국은 사람 시선 높이를 170cm로 두고, 어느 곳에서든 표지판이 보일 수 있도록 표지판 사이 간격을 정한다. 붉은색과 노란색 등 원색을 쓸 수 없도록 색깔도 제한한다. 그러나 한국은 지하철 내부 광고의 색이나 형태를 법으로 규제하고 있지 않다. 광고 내용도 서울메트로 등 운영사가 자체적으로 판단하면 된다. 모니터형이나 조명 등 광고 형태에 대해서만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제정해 제한하고 있지만 권고 사항에 그친다.

 강성중(산업디자인학) 건국대 교수는 “시설물 구조는 막대한 예산 때문에 당장 어렵다 하더라도 적은 비용으로 디자인을 개선할 수 있는데도 얼마 안 되는 광고 수입 때문에 안전이 뒷전으로 밀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상화·장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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