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보다 무서운 것|기업이 특혜를 입었으면 사회에 그만한 보상을 해야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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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불황과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 불황 하나로도 우리의 마음은 불안한데 가뭄은 이러한 불안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같다.
바로 그것은 우리 생활에 여러가지 균형을 깨뜨리면서 인체나 정신의 극기에 파탄을 가져오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불황이란 말이 누구의 입에서나 흘러나오게 된 오늘의 경제는 실로 기업이나 그 관계된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불만의 수치지만 그러나 눈에 보이게 빽빽하게 돌아가는 경제상황보다 보이지 않게 우리의 지적, 혹은 예술적인 영양소를 파괴하는 것도 불황에서 얻어낸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전시에서의 장사는 먹는 것이 가장 돈벌이가 된다는 말이 있다. 전쟁이란 극한 상황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학문이나 예술적인 취향을 살릴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실증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유동성을 지닌 불황이라는 이 불안한 경제현실 앞에서 다만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만 급급한 느낌이 짙고, 인간사회에서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인간성과 예술이 안타깝게 먼지만 먹고 있는 것같다.
지성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대학생에게까지 외면당한 책들이 서점에서 출판사로 반품되어 실려가고, 가장 마지막까지 붙들지 않으면 안될 정서를 도와주는 음악과 한폭의 그림감상, 혹은 초록의 숲이나 선지빚 놀의 감격조차도 과거로 등을 돌린지 오랜 듯하다.
「아리스토탤레스」의 균형적 정의처럼 인간가치의 등가성에 의한 평등을 근거로 하는 공정을 자연스럽게 배분하는 인내력이 이즈음 우리가 선택해야 할 오늘의 생활방법이어야할 것같다.
조화가 깨뜨려지면 부분도 정상을 잃고 지향하는 목적도 만족치 못할 것이다.
인문과 사회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과거에 대한 관심이나 미래에 대한 우려가 서로 일치해서 위기를 가늠하고 그래서 여러 각도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안목만이 오늘의 인간성이 그 본능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명백한 분기점이 되어질 것같다.
이상주의는 야속한 공리주의와 이기주의와 싸워 이겨서 어느 시대이든 이상주의가 우리정신의 바탕을 이룰수 있음을 보여줘야한다.
그것이 곧 여러가지 의미의 균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6·28 경제활성화 대책을 본다면 기업들에 돌아간 특혜는 크다고 보겠다. 그러나 기업들은 그 특혜를 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사원이나 모든 국민에게 상환보완할 수 있는 아량과 능력을 아끼지 않아야하고 그것이 오늘의 경제균형에 마땅히 힘이 되어주길바란다.
예금이자가 인하되고 가명예금을 할 수 없게 되자 인출소동이 벌어지고 인플레를 대비한 약삭빠른 사람들은 현물유치에 혈안이 되어 금품을 사모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지만 실상 이것은 또 얼마나 흉측한 부균형의 소치인가.
설사 그것이 정당하다 해도 자신의 삶에만 정성을 쏟는 사람은 위대한 인간관계를 해치는 원인이 된다.
세상이 극히 어려울 때는 자기자신의 구원을 바라는 일외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편협함이 더 극심한 사회병폐를 만들고 자기 구원을 고갈시키는 것임을 자각해야겠다.
그것이 사회의 균형이요, 따라서 개인의 안정일수 있기때문이다.
적어도 인간사회에선 인간의 본성에 따른 필요와 사용의 선택, 사고력과 상대성에 의한 사회와의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인간적이란 말을 바로 커뮤니케이션을 의미한다고 했는지 모른다. 사회의 부조화는 이성과 이상을 허약하게 만들고 이기와 공리가 커져서 인간성을 억제시키고 인간성의 형성을 저해시킨다. 어떻게 살아왔나 다시한번 점검하자. 과거를 무시하는 진보는 없다. 과거의 모방이 영원한 진리의 반복이 되둣 전통주의의 앉은뱅이가 되어 창조주의의 날개를 잃는다면 그 또한 슬픈 일이 될 것이며 모든 개인과 사회의 균형에 언밸런스를 가져올 것이다.
「샤롤·패기」는 1902년의 까마득한 시절에 이런 말을 했다.
『단 하나의 참상이 있어도 그사회를 단죄하기에 족하다. 단한사람이 인간으로서 기본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있더라도 그것이 묵과된다면 사회계약 전체가 무효화하고 파기될 충분한 조건이 된다. 한사람이 아직 문밖에 남아 있는 한 그에게 문을 등진 도시는 불의와 증오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낙관주의는 아직 죽지않았다.
예술은 고통속에서도 숨쉬고 있을 것이고 오린지빛 해는 내일 다시 새벽을 열것이다. 한조각의 이상이 우리에게 남아있다면 인간성을 회복시키기에 넉넉할 것이다.
씨앗은 언제나 하나며, 그 하나의 씨앗은 수많은 열매를 낳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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