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경협 타결의 실마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60억 달러 경협에 관한 지난1년 동안의 협상의 발자취나 일본의 태도로 봐서 이번에 동경에서 열린 한일외상 회담이 경협 문제에 결정적인 타결의 돌파구를 열었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한-일 두 나라가 일본의 대한 경제 협력의 명분과 액수와 조건을 놓고 사사건건 심각한 견해차를 보여 왔던걸 생각하면 단 한번의 외상회담으로 매듭이 풀리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범석 외무장관의 일본 방문에 걸고 있던 기대는 성의 있고 진지한 협상의 재개를 위한 「새로운 시작」 정도의 것이었다. 그런데 동경에서 전해지는 보도들을 종합해 보면 사실상 중단 상태에 빠져있던 협상을 재개하여 가능한 한 가까운 시일 안에 합의를 보는데 필요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는 일단 성공한 것 같다.
사실 이 외무의 방일은 미국에서의 귀로에 들른 것이라고는 해도 상당한 무리를 안고 실행된 것이다. 「사꾸라우찌」 일본 외상의 5월 방한 예정이 슬그머니 유산되었기 때문에 외무장관의 일본 방문은 우선 외교 관례상으로도 그렇게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거기다가 우리 형편으로 보아도 개각과 잇단 경제 활성화 조치 등으로 주요 각료가 오래 자리를 비울 처지가 아니다.
이런 형편을 잠시 접어두고 이 외무가 일본 방문을 결심한 것은 우리자신의 경제사회 개발에 유용할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지역 안보에 큰 파급 효과를 제공할 경협 협상에 대한 우리의 적극성과 유연성을 반영한 것이다.
일본은 경협 문제에 정도가 지나칠 만큼 인색한 태도를 보여온 게 사실이다. 지난 4월 외무성의 「야나기야」 심의관이 서울에 와서 일본의 최종안이라면서 제시한 경협안은 총액 40억 달러에 공공차관(ODA)15억 달러, 수출입은행 융자 25억 달러로 되어 있었다.
그러고도 일본은 한국에서 장 여인 사건이 일어나 잠시 사회불안과 경제적인 어려움의 기미가 보이자 협상을 다시 시작하기보다는 한국사태의 진전을 지켜봐야겠다는 약삭빠른 자세를 취했다.
감정대로 하자면 이런 마당에 외상 회담을 가질 처지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의 「외교적인 기교」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큰 일을 그르칠 만큼 감정적일 수는 없었다.
참으로 다행한 것은 「사꾸라우찌」 외상을 비롯한 일본 지도자들이 이 외무의 방일에 나타난 우리측의 진지한 자세를 성의 있게 평가하여 경협 조기타결의 원칙에 의견일치를 보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가 꿔달라는 액수와 내용, 그리고 일본이 꿔주겠다는 액수와 내용간에는 아직 큰 차이가 있어 낙관만 할 수는 없다. 「야나기야」안에 대해서 이 외무는 ODA 27억 달러와 상품차관 13억 달러로 된 총액 40억 달러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에 일본은 상품차관은 액수는 고하간에 한국같이 GNP 1천 5백 달러가 넘는 중진국에는 제공할 수 없다는 원칙론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동경회담에서 일목은 상품차관을 제공할 수 있다는데 까지는 신축성을 보인 것 같아 협상 전망이 한결 밝아진 인상이다.
한-일간의 경협 교섭이 제대로 안 되는 가장 큰 원인은 경제외적인 요소에 대한 평가의 차이 탓이다.
한국은 GNP의 6%, 국가 예산의 35% 이상을 국방비에 쓰면서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동북아시아를 방위하는 어렵고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이점은 미국을 비롯한 우방들이 모두 인정하고 평가하는 바다.
우리가 이번에 바라는 것은 이런 사정을 고려한 경제적인 이해타산 「플러스 알파」다.
거기다가 65년 국교 정상화이래 쌓인 우리의 대일 무역적자 2백 25억 달러까지 꼽으려 들면 우리측 주장은 한층 설득력이 커지지만 지금부터 잘해 보자고 굳게 손을 잡은 마당에 그저 웃는 얼굴로 일본의 유연한 자세와 성의만을 촉구하고 싶다.
이 외무가 제시한 총액 40억 달러는 우리측의 대폭적인 양보다. 이 보다 더 건설적인 타결의 실마리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임을 일본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