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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작가 강준식 씨가 본 「소련 속의 교포실태」|상당한 생활수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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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교포들의 생활수준은 일반적으로 평균 소련인의 그것보다 높다. 이것은 특별히 교포들의 직업수준이 소련인 보다 높아서 라기 보다는 한국인 특유의 근면성 때문이다.
직업수준은 블루칼러가 많으므로 오히려 낮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경제적으로는 보다 높은 소득을 올린다. 일반교포가정들을 방문해보면 소파· 침대· 식탁· 냉장고· 가스레인지·미싱 등의 생활필수품 이 외에도 전축·카세트·컬러TV 등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소련의 생활수준이 많이 나아진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포가정들은 소련제보다 좋은 일제전자제품을 장만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구체적으로 근면성이 수입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것은 자영농업 및 자유시장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소련과 같은 통제경제의 사회에서는 생활필수품의 공급이 향상 수요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그래서 농산물, 특히 식탁을 신선하게 해주는 채소는 늘 공급이 달리게 마련이다. 자유시장이란 바로 모자라는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여기서 파는 농산물은 국영농장의 것이 아닌 개인작물이어야 한다.
가격도 통제를 받지 않는다. 따라서 이곳에서 파는 채소는 국영식품점의 채소보다 싱싱한 대신 값도 비싸다. 결국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극히 제한적으로 자본주의의 시장경제를 도입시킨 것이 이 자유시장이다.
여름철이 되면 이 자유시장은 농작물을 팔러 나온 한국인들로 일대 성황을 이룬다. 이 사정은 사할린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필자가 방문한 것은 5월말로 하바로프스크의 기후로는 이른봄이었기 때문에 아직 농산물 철이 아니라 그 같은 장관은 구경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곳 상인들의 상당수가 한국인들이었다. 남의 농산물을 받아서 팔 수는 없다. 자기가 기른 농산물을 자신이 이곳으로 갖고 나와 팔아야한다. 판매수입은 전부 판매자의 것이다.
그러나 밭일을 하고 또 판매를 해야한다는 것은 여간 근면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 한국인이라면 부부가 한 팀이 되어 남자는 농사를 짓고 아내는 판매를 한다. 소련 인으로선 이 점이 어렵다 .
제약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많다. 누구든 직업을 그만 두고 집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6개월 이상 국가직장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60세에 은퇴할 때까지 최소 25년간 계속 해서 국가에 봉사해야한다.
그러나 여자의 경우 아이를 둘 이상 낳으면 이 같은 의무에서 해제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실제로는 남편의 월급만 가지고는 생활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곳 실정이다.
따라서 자영농업은 이론적으로 60세 이상의 은퇴 자 몫이다. 은퇴자가 아니면 시간적으로 해내기 어려운 자영농사를 한국인들은 은퇴자가 아니라도 해내고 있다.
남편은 직종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주 5일, 하루 8시간 근무하는 직장에 나간다.
우리 교포 남편들은 휴일이나 직장을 끝내고 귀가한 뒤 밭일을 돌보며, 부인들은 간간이 밭일도 보고 판매 일을 도맡아 해치우고 있다.
교포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렇게 자영 밭에서 기른 채소를 자유시장에 직매하면 1년에 8천 (8백 만원) ∼1만 루블(1천 만원)의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소련 중견 노동자의 월급 1백80루블(18 만원)과 비교하면 이 수입은 엄청난 액수다.
그래서 교포들은 너도나도 그 힘든 밭일을 하고 있다. 교포들의 경제적 능력이 그래서 소련인의 평균치를 훨씬 상회 할 수밖에 없다. 2세들의 교육 수준이 높은 것도 바로 이 같은 한국인 1세들의 높은 경제력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학비가 무료인 소련 사회라 해도 2세를 상급학교에 진학시키려면 다른 도시로 유학 보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교통비·생활비등 지출요인은 적지 않다.
자영농업을 하려면 국가에서 제공해주는 아파트에 살아서는 안 된다. 단독주택을 자기 돈으로 사야한다. 그러나 2백∼3백 평 정도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밭이 달린 단독주택의 집 값은 8천∼1만 루블 선으로 1백80루블 짜리 월급장이로서는 큰돈이다. 이에 반해 목욕탕과 부엌이 달린 방 두 개 짜리 국영아파트의 월세는 단돈 15루블(1만5천 원).그러나 교포들은 이처럼 비싼 단독주택을 목돈을 주고 산다. 최근 사할린에서 이주해온 교포들도 대부분 집을 사들였다.
꽉 짜여진 사회주의 체제에서 일반 소련인 들은 좀처럼 만져볼 수 없는 이 목돈은 어떻게 조달되는가.
한민족 특유의 상부상조 전통이 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비결은 계 제도다. 만일 월급장이 부부가 1만 루블 짜리 개인주택을 구입하려고 계획을 세운다면, 통상 남편 1백80루블, 아내 1백20루블 합계 3백 루블 (30만원)의 월급으로선 쓸것 제하고 낼 것 내고 입고 먹으면 저축할 돈이라고 거의 없다. 집세와 그 밖의 몇 가지 가격동결품목을 제하면 소련의 물가도 그렇게 싼 것은 아니다.
보통식당에서 밥 한끼 먹으려면 1인 당 한화로 2천∼3천 원 가량 있어야 하며 택시 비는 한번 타면 한화로 약 1천∼2천 원 나온다. 그러니 월급가지고선 개인주택 구입하기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우선 계를 타서 집을 사고 자영농업을 하면 집 값 1만 루블은 1년 안에 빠진다.
『자기 장사만을 열심히 한다고 소련사람들의 야유도 받습니다. 국가 일에 그만큼 충성하면 노동영웅의 칭호도 받을 거라 고요. 그러나 돈은 벌어야지요. 우린 자본주의 시대에도 살아본 사람들 아닙니까]
제주도 출신의 한 아주머니는 내게 그렇게 말하며 가관대 위의 빨간 무우를 손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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