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박찬욱 감독 '친절한 금자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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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금자씨 어때요?" 묻는 이가 많은 걸 보니 화제작 맞다. 영화 홈페이지에는 18세 관람가를 서운해하는

자칭 고교생의 글도 적지 않다. 금자씨, TV드라마의 삼순씨.금순씨와 달리 친절하지 않다.

멜로다, 스릴러다, 재미있다, 시시하다, 이렇게 한마디로 단정짓기 쉽지 않다는 말씀이다.

게다가 이 영화감독 박찬욱씨 머리 뒤에는 예고용 포스터의 금자씨 뺨치는 후광이 빛나지 않는가,

칸 영화제 수상 감독이라는. 영화평론가 김봉석씨와 심영섭씨를 모셔 귀동냥을 한 이유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여섯 살 어린이를 유괴해 죽인 죄로 13년을 복역하고 갓 출소한 이금자(이영애)는

자신을 감옥에 보낸 백 선생(최민식)에 대한 복수에 돌입한다. 참, 찬욱씨가 이 영화를 '복수는 나의 것'(2002년), '올드보이'(2004년)와 함께 복수를 주제로 한 3부작으로 부른다는 것은 아시겠지.

***어여쁜 금자씨

하이힐 신고
마스카라는 붉게
복수 도구도 예쁘네

고교 시절 제법 놀아본 학생이었던 금자씨는 어찌어찌하다 스무 살 꽃 같은 나이에 살인현장 검증에 불려나와 언론의 조명을 받는다. 흔들리는 뉴스 화면 속, 마스크로 살짝 미모를 가린 금자씨는 언뜻 대한항공기 폭파범 김현희와 닮은꼴이다. 이 밖에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엽기적 사건' 을 연상시키는 요소가 노출된다. 하지만 봉석씨 말마따나 "이미지를 따왔을 뿐 사회적 발언이 담긴 건 아니다." 아무튼 금자씨의 미모와 스타일은 알아줘야 한다. "친절해 보일까봐" 했다는 붉은 마스카라와 하이힐이 기본이고, 복수의 무기에도 세련된 조각 같은 장식을 새겨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금자씨 왈, "예뻐야 돼. 뭐든지 예쁜 게 좋아". 그게 금자씨뿐이랴. 이 영화 역시 영섭씨 지적처럼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편집"이 유려하고 시각적 이미지가 과잉이다 싶을 만치 화려하다. 봉석씨가 전한다. "류승완 감독이 말하기를, 박 감독은 장면마다 어떻게 하면 남이 안 찍은 걸 찍어볼까 고민한다고 하더라."

***종교적인 금자씨

복수를 해도
통쾌하지가 않아
구원을 다룬걸까

다 밝힐 수는 없지만, 결국 금자씨가 복수를 하는데도 짜릿하거나 통쾌하지 않다. "복수 3부작 모두가 원죄와 구원에 대한 얘기다. 실제는 누구도 그렇게 치명적인 죄를 짓지 않았다. '복수는'의 송강호는 부르주아라는 것, '올드보이'의 최민식은 입을 가볍게 놀렸다는 것이 일종의 원죄다. 금자씨도 마찬가지다." 이건 봉석씨 말인데, 원죄는 복수를 통해 씻기 어렵다, 내가 너를 죽이는 복수는 그게 끝이 아니다, 다시 죄를 뒤집어쓰는 행위다, 그러니 복수는 구원받는 길이 아니고, 그래서 감독은 관객에게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지 않는다는 추정이다. 영섭씨도 이 3부작이 "점점 종교적이 되어간다"고 했다. 교도소에서 제빵기술을 익혀 나온 금자씨가 자신이 만든 케이크를 한 무리의 사람들과 나누는 장면이 흡사 예수와 12 제자의 '최후의 만찬' 같고, TV다큐 '인간극장'풍의 내레이션도 마치 금자씨의 행적을 복음서를 흉내내 전하는 것 같단다.

***웃기는 금자씨

잔혹한 장면에서
엉뚱한 대사 툭~
웃기는데 슬퍼

사실 이 영화의 내레이션은 너무 진지하게 엉뚱한 얘기를 곧잘 해서 관객을 웃긴다. 손가락이, 손목이 잘려나가고 성적 학대가 등장하는 이 잔혹한 영화 곳곳에 이처럼 상황과 대사의 충돌로 웃기는 대목이 여럿이다. 영섭씨는 "백 선생과 금자씨가 죽느냐 마느냐, 극한 대립을 할 때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영어통역이 제일 웃겼다"고 꼽았다. 기자는 웃으면서도 슬펐다. 영섭씨는 "불편한 웃음"이란다. 휴머니즘의 역사적 기원에는 온전한 인간신체에 대한 찬양이 들어있는데, 박 감독은 영화마다 빠지지 않는 신체절단을 통해 그걸 농락한다는 주장이다. 냉정한 영화라는 데 봉석씨도 뜻이 같다. "정서적인 충동이 아니라 철저하게 지적으로 계산된 영화"란다. 어쩌면 감독이 원한 건 "한 편의 성화 아닐까"한다. 작은 장면 하나까지 상징성으로 가득한. 다채로운 조연들의 풍성한 에피소드가 차진 드라마의 맛을 내지 않는 이유도 이게 아닐까.

***금자씨를 소개합니다

평론가들에게 한마디로 소개를 부탁하자 "키치적 성화의 이미지"(봉석씨), "굉장히 똑똑한데 멍하다"(영섭씨)는 답변이 알쏭달쏭하다. 봉석씨는 "금자의 내면을 말할 만큼 충분한 정보가 영화에 없다"고, 영섭씨는 "심리적인 영화가 아니라 철학적인 영화"라고 덧붙인다.

음, 기자가 떠들 수밖에. 3부작의 주인공 중 금자씨는 유일한 여자다. 할리우드 여전사들처럼 근육을 단련하는 대신, 때로는 장기마저 기증하는 지독한 친절로 교도소 내 엄청난 인맥을 구축한다. 금자씨의 인적 네트워크는 수랏간의 장금이 뺨친다. 그리고 금자씨는 모성(母性)이다. 여자인 동시에 원죄와 복수, 혹은 속죄와 구원이라는 풀기 어려운 매듭에 묶인 인간의 추상이다. 금자씨가 갈망한 건 어쩌면 복수보다 속죄가 아니었을까. 출소 직후 두부를 건네주는 목사를 향해 "너나 잘하세요"라며 접시를 엎었던 금자씨는 이 영화의 마지막에 두부 열 모 크기쯤 되는 하얀 케이크에 얼굴을 비벼대고야 만다. 복수든 속죄든 참으로 어렵고, 이 복수극을 명쾌하고 가뿐하게 따라가기 역시 어렵다. 감독의 죄인지, 기자의 원죄인지.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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