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 美 최고의 커뮤니케이터 … 마거릿 대처 총리도 누그러뜨려

중앙일보

입력

‘위대한 소통자’로 불렸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화술이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도 누그러뜨리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영국 언론들은 10일(현지시간) 일제히 레이건 대통령과 대처 총리 간 전화 통화 내역을 보도했다. 두 사람은 냉전 체제 종식을 앞당긴 ‘정치적 동반자’였다. 그러나 통화가 이뤄질 당시는 1983년 10월로, 미국이 영국의 보호령인 중남미의 그라나다를 침공한 직후였다. 대처 총리는 미국의 개입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미국 측으로부터 사전에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해 격분했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전화를 걸었다.

▶대처 총리=대처입니다.

▶레이건 대통령=내가 거기 있었다면 들어가기 전에 모자부터 던져 넣을 거요.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어떤 장소에서 사람들로부터 환영 받을 지 알 수 없을 때 모자부터 던져 넣던 관행을 언급한 것이다. 에둘러서 대처 총리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내비친 거다. 이에 대처 총리가 한결 누그러진 반응을 보였다.)

▶대처 총리=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레이건 대통령=아녜요. 당신을 당황케 해 매우 유감입니다. 당신에게 얘기하고 싶은 건 우리 때문이라는 겁니다.(그는 기밀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게 미국 쪽 사정 때문이었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는 “계속 정보가 새나가서 골치”라며 “우리가 걱정한 건 당신 쪽이 아니라 우리 쪽”이라고 했다.)

▶레이건 대통령=부디 이해해 주세요. (다소 쑥스런 목소리로) 우리 스스로 기밀 유지를 못하는 게 우리의 약점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대처 총리=그렇게까지 말하다니 매우 친절하시군요, 로널드. 낸시(레이건의 부인)는 어떤까요.

▶레이건 대통령=잘 지냅니다.

▶대처 총리=안부를 전해주세요.

영국 BBC방송은 이 대화를 두고 “은막 출신의 대통령이 유창한 언변(silver-tongue)까지 갖췄다”고 평했다.

이 녹음은 미국의 레이건도서관이 보관해 오던 것으로 윌리엄 도일이란 작가가 청구한 지 18년 만에 공개된 것이다. 도일은 “위기 중인 미국 대통령이 원고 없이 한 비밀 통화가 공개된 건 놀라운 일”(뉴욕 포스트)라고 했다. 실제 백악관 상황실에서의 대통령 대화가 공개된 건 처음으로 알려졌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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