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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2030 세상 읽기

'실미도' 썼으니 군대 잘 알 거라고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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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방학을 맞아 가열차게 쉬고, 가열차게 일해보자 작정했던 터에 원고 청탁은 사절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주제가 여성과 군대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경박하기 그지없는 웃음이 터지며 쓰겠노라 이야기해 버리고 말았다. '30대 중반의 아이엄마'인 필자로선 '실미도'라는 작품을 쓰고 난 후 군대와 연관된 다양한 질문을 받아 왔다. 그러나 이렇게 단호한 공격(?)은 처음이었기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난 후 경박한 웃음의 후유증으로 시작된 딸꾹질에 맞춰 후회가 밀려왔다.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딸만 셋인 집이었으니 형제를 군에 보내 본 경험도 없고,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이미 3년 반의 군복무를 마친 사회인이었으니 눈물바람으로 연인을 군에 보내 본 경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대한민국 여성들이 갖고 있는 군대에 관한 간접경험의 평균만큼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실미도'에서도 그랬고 그 이전에도 나는 군인들의 이야기를, 그 정신을 그리는 일에 거부감이 없었다. 군인정신에 입각한 주인공들을 마음껏 사지로 내몰아 놓고 고귀한 가치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이야기에 스스로 도취한 경험도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30㎏인지 40㎏인지 모를 완전군장으로 50㎞의 구보를 해 보지 않았고, 새벽 2시에 영하 20도의 산속에서 보초를 서 보지도 않았으면서. 몇날 며칠 씻지도 자지도 못한다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를 모르면서, 그저 멋있는 세계일 거라고 단정해 버린 근거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6주의 훈련으로 군 경험을 마친 아주버님이나 6개월 만에 제대한 큰형부나 만삭의 아내를 두고 41개월의 군복무를 해야 했던 작은형부나, 경험의 시간과 밀도에 관계없이 군대에 관한 이야기에는 같은 질량의 정서를 쏟아낸다. 지금은 떠나보냈지만 가슴 아픈 기억과 함께 떠올리는 애증 어린 옛 연인을 추억하는 것과 비슷한 색깔의 정서다.

이제 명백해진다. 대다수의 여자에게 군대는 가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갈 수 없는 세계, 혹은 가지 않을 세계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는 '멋있을 거야'라거나, '우리도 하면 하겠지'라거나… 이런 추측성 어미로 그려지는 상상도가 되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현실과 의무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들에게 이런 추측성 종결어미의 문장은 상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멋있을 수 있고, 여성들에게 의무가 된다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에게 병역의무를 부과하는 나라가 없는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 여성들이 여러 분야에서 상당히 우수하다는 것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나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같은 국제기관이 입증해 주고 있으니 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아직은 여성이 군인으로 살아가는 의무에 대해 쉽게 논하고 싶지 않은 것은, 법으로 의무가 된다 해도 나는 이미 그것을 벗어난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들려오는 좋지 않은 소식을 들을수록 말을 삼가게 되는 것은, 결국 평생 나라를 위해 발가락에 물집 한 번 잡혀 보지 않을 것이면서 누군가 때로 죽음을 꿈꿀 만큼 극심한 인내를 가지고 견디는 세계를 입에 올리는 것이 민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희재 시나리오 작가

◆ 약력=추계예술대학교 교수(영상문화학부 영상시나리오 전공). '실미도'로 대종상 각색상 수상. 남편과 함께 시나리오 창작회사 '베네딕투스' 운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