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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가 있는 아침 ] - '소주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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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공광규(1960~ ), '소주병'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불을 품은 몸의 사내(소주병)가 있다. 그를 마시고 사람들은 피가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을 누군가가 다 소비했을 때 그는 비참하게 버려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시인은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에서 아버지의 흐느낌을 듣는다. 그도 어느새 잔(자식)에다 자기를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가는 아버지가 된 것이다.

이재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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