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관치」탈피만이 체질개선 첩경|잇단 대형사고…무엇이 문제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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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은행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은행을 과연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한 여인의 손에 의해 1천억 원 이상의 손실을 입게 되고 일개 지점차장이 86억 원이란 거액을 유용 하는 판이 됐으니 은행공신력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장영자 여인사건은「배후」를 업은 힘 앞에 줏대 없이 놀아난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금융기관이 뒤집어쓰게 된 손실규모에서도 충격적이다.
은행감독원이 국회에 낸 자료에 따르면 손실액(추정)은 1천3백56억 원. 공영토건 및 일신제강의 주거래은행인 상업은행만 6백억 원의 손실을 입게 됐다.
6백억 원이면 자본금의 60%다.
또 조흥은행의 김상기 차장이 유용한 돈은 자본금의 약10%에 해당한다.

<사고 때마다 특융>
예금주로부터 맡은 돈을 이렇게 엄청나게 떼이고 은행직원이 멋대로 빼내 쓴다면 누가 은행에 돈을 맡기려 할 것이며 어느 기업이 운행을 믿고 거래하겠는가. 왜 이런 사태가 되었을까.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대형금융사고는 그 동안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이번 두 사건은 특히『배후의 비호』 를 내세우고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지난74년의 박영복 사건과 79년의 율산 파동은 제도의 허점(수출금융)을 악용한 케이스로 볼 수 있지만 장 여인 사건과 김상기 사건은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
배후의 힘을 동원한 사람과 그 앞에서 설설 기는 은행간부들의 합작 품이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금융제도와 관행, 경제구조,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면에서 금융사고의 발생가능성을 많이 갖고 있다.
제2의 장 여인사건, 또 다른 김상기 사건이 안 터진다고 누구도 보장할 수 없게 돼 있다.
한 기업에 물린 돈이 방대해졌기 때문에 금융사고는 터졌다 하면 대형화할 공산이 크다.
80년 2월 신생 대봉 그룹이 무너질 때 거기에 물렸던 충북은행을 돕기 위해 한국은행에서 2백96억 원의 특융 조치를 해줬다.
초석건설이 부도났을 때 경기은행에 대해서도 1백33억 원을 융자해 줬다. 또 신승기업 부도 때는 두 은행(제일·조흥)에 대해 약 4백억 원의 특 융을 해주었다. 이 같은 사례들은 한 기업이 잘못될 때 금융사고 규모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말해 준다.
특히 최근 해외건설과 중화학업계의 고전은 은행을 몹시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해외건설은 공사 한 건, 업체 하나의 금융규모가 크기 때문에 대출과 지급보증을 해준 은행은 엄청난 위험부담을 안게 된다.
작년 말 현재 해외건설공사(21건)에서 적자를 보아 지급보증 해준 은행측이 입게 될 손실은 1천20억 원에 달한다는 관계당국의 분석도 나와 있다.
부도가 난 일신제강에 대한 금융기관의 대출 가운데 1천8백억 원, 공영토건에 대한 대출 및 지급보증가운데 4천5백억 원이. 담보부족으로 밝혀졌는데 기업 하나 하나에 은행의 명 운이 걸린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렇게 높은 위험부담 속에 금융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소지가 아직도 허다하다는 것은 아찔한 일이다.
대형금융사고를 예방하는 대책은 그래서 시급히 마련돼야 할 과제다.
지금까지 발생된 금융사고는 따지고 보면 오랜 관치 금융의 병리에서 빚어진 것이다.
외부간섭 없이 은행 스스로 할 것이다.
관에서 간섭하고, 지시하고, 관에 잘 보여야 은행원으로 출세할 수 있는 풍토에서는 건전한 금융은 연목구어나 마찬가지다.
관치 하에서는 창의와 자율과 책임이 자라날수 없다. 오직 무사 안 일이 몸에 배고 눈치보는 능력만 키워질 뿐이다.

<보잘것없는 예금 고>
관치 금융의 폐단을 시정한다고 정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떠들어 왔지만 말과 실제는 아직도 거리가 멀다.
이른바 정책금융은 계속 증가하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지시금융이 하달된다.
은행장을 비롯한 임원인사를 정부에서 관장한다. 은행원들의 급여수준 조정도 정부와 사전 협의해야 한다.
이러한 관 치의 그늘은 아직도 건재한 데 금융자율화니, 민영화니 떠들고 있으니 실질적인 개선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관치 금융이 빚은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은행임직원 자신들의 책임과 자율의식 결여다.
매사를 상부의 지시에 쫓아서 하고 책임을 안 지려는 생각이 고질화 돼 있다.
은행원 스스로 타율 속에 안주하려고 하는 것은 지금 안고 있는 문제들의 뒤치다꺼리를 기피하고자 하는 심리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은행마다 불량채권을 숱하게 안고 있다. 그것은 거의가 관치 금융 속에서 힘있는 자에 의해, 또는 정부정책에 의해서 짊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 와서 금융자율화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미 저질러 놓은 일을 은행측에 떠미는 것밖에 안 된다고 하는 얘기가 은행 쪽에서 나오는 것도 그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오랜 관치 금융은 금융산업발전을 더디게 할 중요원인도 된다.
실물경제의 성장을 금융은 따르지 못했다. 실물과 금융간의 괴리는 경제의 왜곡을 더욱 심화시켰다.
웬만한 기업하나 쓰러지면 주거래은행은 자본금과 맞먹는 손실을 입을 만큼 왜소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5개 시중은행의 예금 고 합계가 일본의 한 개 은행에도 훨씬 못 미친다고 한다. 얼마나 규모가 작은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기업은 세계 톱 랭킹 5백 위 속에 들어가는 것이 여럿 생겨났다.
토끼걸음 기업에 거북이걸음 은행이다.

<기업규모 못 따라>
실물에 비해 금융이 낙후하게 된 것은 관의 시각에서만 은행을 보아 왔고 보호했기 때문이다.
작년가을에 정부가 은행법을 개점하려다 좌절당한 일이 있다.
대기업에 의한 금융독점과 편중대출을 막기 위해 동일인에 대한 대출한도(은행자기자본의 25%) 와 지급보증한도를 엄격히 규제하자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대기업들이 들고 일어나 로비활동을 하는 바람에 법개정작업은 보루 됐는데 개정안대로 하면 대기업들 대부분이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은행의 자금력은 약한데 반해 한 개 기업이 갖다 쓴 돈은 방대하다.
현재의 은행자금력으로서는 많은 기업을 동시에 뒷받침 해줄 만한 능력이 없다.
그러니까 은행은 항상 자금이 부족해 쩔쩔매고 지준 부족사태를 밥먹듯 한다.
은행은 자금력을 확보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무리한 예금 경쟁 율을 벌이게 된다.
예금을 끌어오기 위해 사채업자와 결탁도 하고 또 커미션을 주기도 한다.
자연히 거금을 맡긴 사채업자에게 약해질 수밖에 없다.
장 여인사건은 그런 관계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관치 금융에서 고질화된 이러한 금융의 허약 체질은 의식의 변화를 수반해야 하는 것이므로 쉽게 고쳐질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방치하면 방치할수록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서둘러서 마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 일은 은행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철저한 상업주의의 정착밖에는 없다.
상업주의는 민영화에서만 가능한일이다. 그래야만 자율과 책임이 은행경영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은 게임의 룰만 정해주고 그것이 잘 지켜지나 감독만 해야 한다. 그러한 분위기가 확립되면『배후』나 힘있는 사람이 끼어 들 여지가 없어질 것이다. <이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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