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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일본 외교는 누가 움직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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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본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힘이 있는 사람'을 찾으러 내려온 우주인이 이리저리 헤매다 허탕치고 돌아갔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일본 정치구조는 전통적으로 매우 분권적이다. '천황제'라는 제도 자체가 정치적으로는 실체가 모호하다. 어느 학자는 이를 가리켜 한가운데가 텅 빈 "도넛형 권력구조"라 불렀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말하는 "무책임의 체계"이기도 하다.

일본의 우경화를 바라볼 때도 이러한 시각이 필요한 것 같다. 지금 일본의 '평화헌법' 체제가 급속히 변질할 조짐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일본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된 체계적인 움직임이라 보기는 '아직은' 어렵다. 장기적인 전략하에 착착 진행되는 통제되고 계산된 야욕이나 음모를 객관적으로 확인하기도 쉽지 않다. 지금 일본의 문제는 일관된 전략의 과잉이 아니라 전체적인 외교 전략의 부재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관료가 통제해온 외교가 탈냉전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부분적인 특수 이익들이 발호하면서 외교를 휘젓고 있다. 일본 국민도 막연한 불안감 속에서 객관적인 이해관계보다는 감정적 구호에 동원되고 있다.

그간 일본 외교의 향방을 규정해 온 것은 납치, 역사(야스쿠니 신사 참배), 그리고 자위대로 요약된다. 지난해 11월의 '가짜 유골' 사건 이후 일본 정부가 "납치 피해자 중 일부는 생존해 있다"는 전제하에 "조속한 귀환"을 정식으로 요구한 이래 북.일 교섭은 중단 상태에 빠졌다. 일본 내에서는 경제제재론이 급등했지만 미국 조지 W 부시 정권이 대북 교섭론으로 선회할 조짐을 보이면서 일본은 고민에 빠졌다. 대북 강경 방침이 동북아시아 외교 과정에서 일본을 오히려 고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야스쿠니 참배와 역사 교과서 문제는 국내 정치적 계산, 뿌리 깊은 보수적 역사관, 일본의 상대적 위상 저하에 대한 보수 우파의 위기의식 등 다양한 요소가 얽혀 있다. 역사 문제가 한국 및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면서 민주당뿐 아니라 집권 자민당 내에서도 야스쿠니 대안 모색과 동아시아 외교 재구축 논의가 구체화되고 있다.

그러나 대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린 고이즈미 총리가 오히려 '8.15 야스쿠니 참배'라는 정면 돌파를 강행할 조짐조차 보이고, 후소샤 역사 교과서도 5년 전보다 채택률이 크게 높아질 기세다. 자위대도 미국의 군사전략, 북한 위협론에 힘입어 일본의 군사력 행사에 부과된 정치적.물리적 제약을 하나씩 해소하는 '보통국가화'를 추진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미.일의 군사적 일체화, 즉 일본이 군사적으로 미국에 통합되는 과정이기도 하며 일본으로서는 '양날의 칼'과 같은 선택이다. 일본 자신의 국익에 항상 합치한다는 보장이 없는 고민이 따른다.

복잡한 구조를 지닌 일본의 우경화에 대처하는 방법도 다양하게 강구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압력, 즉 '외압'은 중요하다. 야스쿠니를 포함한 역사 문제에 대한 원칙을 명확히 하는 것은 일본 내에 문제 제기를 하기 위해 여전히 필요하다. 한국 정부의 역사 문제 제기는 그동안 편의적.일시적 성격이 강했던 것도 사실이다.

둘째로는 '포용'전략도 필요하다. 일본 대중에 다가서는 형태와 언어로 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일본 내 양심세력뿐 아니라 정.재계 지도층에도 파고드는 노력, 일본의 장래 방향도 포괄하는 지역적 안전보장 협력체제의 다각적 시도 등이 이에 포함될 것이다.

셋째로는 재일한국인의 지방 참정권 획득과 같이 일본 사회를 내부에서부터 변화시키는 방도도 추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이 먼저 정주 외국인의 지방 참정권을 부여한 조치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일본이 걷는 길에 한국이 미칠 영향력은 적지않다.

이종원 일본 릿쿄대학 교수.국제정치학

◆약력=1953년 출생. 서울대 중퇴 후, 일본 국제기독교대학 졸업. 도쿄대 대학원 수료(법학박사). 전공은 동아시아 국제정치. 미국 프린스턴대 객원연구원 역임. 저서에 '동아시아 냉전과 한.미.일관계' '북.일교섭'(공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