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대통령 TV토론] 핵심현안 궁금증 되레 키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1일 밤 MBC-TV의 100분 토론에 출연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민감한 현안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않고 비켜가는 화법을 구사했다.

그런 사례의 상당 부분은 이념.측근.민주당 관련, 재벌개혁 문제 등 예민한 정국사안이었다. 대선 당시 지지층, 또는 보수층.미국과의 관계 설정과도 관련이 있는 대목이었다.

방미를 앞둔 盧대통령의 고민스러운 입장을 느끼게 했으나 "핵심 현안에 명료한 설명 없는 대통령의 TV토론은 국민의 궁금증을 씻어주는 대신 일방홍보로 흐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 초등학교 교사가 '이라크 전쟁'에 대한 시각을 묻자 盧대통령은 "선생님으로서 아이들 가르칠 때 할 말과 대통령으로서 공개적으로 하는 얘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며 넘어갔다. 盧대통령은 한참 후 "선생님께서는 김옥균의 갑신정변과 김구의 단정노선을 어떻게 가르치느냐는 질문으로 답변을 대신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라크전과 파병결정 등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소신을 분명히 밝히고 국민을 설득할 호기를 놓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행사를 준비한 조광한(趙光漢) 홍보기획비서관은 "지성인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 사이의 고뇌가 있는 것 아니냐"고 설명했다.

그러나 盧대통령에 대한 미국 내 보수층의 분위기가 한국의 이라크 파병 결정을 계기로 우호적으로 돌아선 데 대해 청와대가 반색하는 상황이어서 盧대통령이 이런 분위기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고 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이냐는 질문에도 盧대통령은 "거 참 말하기 곤란한 부분"이라며 "실제 한국군의 자주국방 역량이 지나치게 낮게 평가받고 있다"는 식의 원론적 답변에 그쳤다.

안희정(安熙正)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관련 사안도 구체적 언급은 피해갔다. 나라종금의 돈이 盧대통령의 대선캠프 격인 자치경영연구원으로 유입된 사실이 드러나 盧대통령의 사전인지설로 번지고 있으나 盧대통령은 "나중에 기소가 되고 수사가 끝날 때쯤 밝히겠다"고 답을 미뤘다.

청와대 측은 이날 소식지인 '청와대브리핑'에서 "청와대 수석비서관의 검찰 수사 관련 언급도 파장이 적잖은 마당에 대통령이 직접 언급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원칙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盧대통령 스스로 '동업자'라고 밝힌 安부소장에 대한 검찰의 재소환 보강수사가 검토되는 시점이어서 盧대통령이 '진상'을 공개하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재벌개혁 질문에도 盧대통령은 우회를 했다.

한 패널리스트가 당장 모 생명보험회사의 부당 계약전환 의혹 등을 철저히 파헤칠 의향은 없는지 물었다. 盧대통령은 "오늘 구체적인 답변을 드릴 수도 있으나 이렇게 말씀하면 어떻습니까. 공정거래위원장이 제 지시를 고분고분 따를 분은 아닐 것 같고 소신 갖고 일할 분 같습니다"라고만 했다.

그러나 盧대통령은 바로 이어 "공정거래위원장에게 '(재벌개혁을) 왈칵 했다 물러서지 말고 3년 또는 5년을 두고 목표를 세워 꾸준히 밀고 가라. 그러나 대한민국 기업이 감당할 속도로 합시다'라고 했다"는 말을 추가해 상황을 알쏭달쏭하게 만들었다. 속도조절론과 개혁의 원칙이 혼합된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趙홍보기획비서관은 "각본대로 진행된 토론회라면 명쾌한 측면이 있겠지만 예상 외의 질문에 대한 즉답의 파장을 최대한 줄이려 했다"며 "다소 매를 맞더라도 파장이 큰 정책은 시간을 갖고 충분히 검토한다는 메시지와 그 과정의 대통령의 고뇌를 전달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최훈.강민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